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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이집트 유물이 해외에 더 많은 이유 139 -1

by 짱신나^^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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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박물관으로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 세계 유명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관은 이집트관이다. 그러나 세계 유명 박물관의 이집트 전시관은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다. 대영박물관이 보유한 이집트 유물은 약 10만 점, 루브르 박물관은 약 5만 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약 3만 점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카이로 박물관이 소장한 이집트 유물이 단지 약 12만 점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 

고대 이집트는 풍부한 밀과 보리로 최초로 빵과 맥주를 만들어 먹엇다. 또한 동부 사막과 남부 지대는 남 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금으로 만든 보석과 도금한 보물들이 고대 이집트에는 가득했다. 그래서 황금 가면같은 것도 금이 풍부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람세스 파라오가 이끄는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기술로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이 탄생했다. 

 

기원전 1350년 맥주를 마시는 그림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에서도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후에 살아갈 무덤 장식에 큰 힘을 썼다. 그래서 무덤 안에는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채웠고 또한 무덤이 발달했다. 그래서 이집트를 동경과 탐욕의 눈으로 여러 나라들이 바라봤었다. 

 

이에 파라오는 생전에 무덤을 지키기 위한 대비책을 세웠는데 파라오는 각 분야의 장인들에게 무덤을 만들게 했고 장인들을 무덤 근처에 마을을 조성해 살게 했다. 파라오는 장인들에게 무덤 제작 비밀을 지키기 위해 넉넉한 임금과 곡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나라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넉넉한 임금과 다양한 편의가 거의 사라졌고 유물을 진가를 알아본 이집트인 일부 장인들이 맨 처음 파라오 무덤의 도굴을 시작한다. 기원전 1100년경 기록에는 도굴꾼의 재판 진술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이집트 도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 파라오 무덤 도굴로 훔친 금의 양만 약 14.5 kg (약 3,800돈) 이 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초창기 도굴은 단순하게 비싼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해외 유출의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이집트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혁명으로 혼라스러운 시기 주변국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며 유럽의 패권국이 된다. 이런 와중에 나폴레옹은 약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원정을 간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집트에 총독을 파견해 통치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런 영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유

 

당시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동양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은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아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야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수로와 육로를 통해서 가면 시간은 훨씬 단축될수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점령해야 유럽 패권싸움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 3주간의 공격 끝에 이집트를 프랑스가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를 군사적으로만 제압하는 것이 아닌 이집트의 유물을 탈취해서 이집트를 자신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나폴레옹의 꿈은 금방 좌절되었다. 이집트 점령 4개월 만에 오스만제국을 지원한 영국군에게 패배를 하게 된 것이다.  1801년 약 3년간의 전투 끝에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프랑스 침략은 이집트를 향한 유럽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이집트 유물의 관심을 모은 두 권의 책

이집트 유물의 관심을 모은 두 권의 책있다. 한 권은 1802년에 출간된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학자 드농의 책으로 <이집트 나일강 상류와 하류 여행기> 라는 책이였다. 

 

고대 이집트 유물을 스케치하고 드농의 감상을 담은 여행기

 

이 책에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최후의 구대 이집트 왕조가 세운 <덴데라 신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기둥에 새겨진 하토르 여신의 얼굴, 대피라미드 입구등을 완벽하게 그림으로 재현하면서 그림이 기록처럼 느껴지는 수준으로 고대 이집트 유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농의 책에 담아내면서 프랑스인들의 이집트에 대한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덴데라 신전 : 고대 이집트 사랑과 미의 여신 하토르를 숭배하는 신전
덴데라 신전 기둥
덴데라 신전 기둥의 하토로 여신

덴데라 신전에는 총 11개의 방 중에 '하늘의 방'이 있는데 현재 천문학의 시초가 되는 천장에는 고대 점성술의 결정체인 12개의 별자리가 조각된 황도대가 그려져 있다. 

 

천체를 받치고 있는 36명의 이집트 신들이 그려져있다. / 오른쪽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전시된 황도대 

 

이를 본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가져가기 위해 공학자를 동원해 약 20일 정도 천장을 파내고 자르기 시작했으나 진전이 없자 폭약을 사용해서 가져갔고  현재 원래 자리에는 모조품이 설치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또 한권의 책은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길에 따라간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모든 것을 기록한 <이집트지> 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거대한 유적지의 풍경은 물론 이집트 유물을 디테일하게 기록했다. 이 책으로 이집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 좌상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이집트 열풍이 불게 된다.  유럽인들은 각종 물품에 이집트의 문양을 새겨넣기 시작했다. 유럽의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열광은 곧 탐욕으로 바뀌게 된다. 

 

왼쪽 벽난로 틀/ 오른쪽 보석함.

 

이때 유럽의 이집트에 대한 탐욕을 부추기는 인물이 나타난다. 이집트 유물 반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명은 오스만 제국 시절 이집트 총독 모하메드 알리였다. 이집트의 마지막 와조인 알리 왕조의 창시자로 그는 원래 알바니라 출신인데 오스만 제국의 사령관이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틈에 혼란해진 이집트 정세 속에 권력을 잡은 인물로 이집트가 오스만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한 결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알리 총독이 권력을 잡은 시기는 1805년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영향력이 강화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인다. 총독 자리가 안전하려면 한쪽에 힘이 쏠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 두 나라를 향한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이집트 유물을 발굴할수 있는 공식 허가증을 두 나라아 프랑스와 영국에 발급하게 된다. 발굴 후 이집트 정부와 협상만되면 반출까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당시 이집트의 유물보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할수 있는 알리 왕조를 만들기를 원했던 것이다. 유물 발굴 허가증 덕분에 이집트 유물 도굴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국은 대영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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