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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 왜 철의 여인이 되었나? 총리가 되기까지 138-1

by 365 ^^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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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는 누구? 

이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마거릿 대처가 등장한다. 철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마거릿 대처는 20세기 이후 최장기간 연속 세 번 집권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면서 11년 6개월간 총리로 근무한 인물이다. 

 

마가릿 대처 본명 마거릿 힐다 로버츠 대처는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른 것.

 

마거릿 대처는 지독한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갔다.  이로 인해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추진력으로서의 영국병을 타파한 영웅으로 칭송되었으나 다른 누군가에겐 차갑고 냉혹한 태도로 영국의 미래를 망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 어린시절 

마거릿 대처는 링컨셔 그랜섬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마거릿 대처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의 영향으로 십 대 시절부터였다. 마거릿 대처의 아버지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시의원으로도 활동할 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거릿 대처를 자신이 참석하는 정치 행사마다 데리고 다녔고 지역 선거에서 보조원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그래서 마거릿 대처는 10대의 어린 나이에도 자신이 정치를 원하는 걸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OUCA(oxford university Conservative Association) 옥스퍼드 보수당 협회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영국의 보수당 VS 노동당 

그러나 졸업 후 마거릿 대처는 플라스틱 제조회사에 입사한다.  정치를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서였고 보수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며 정치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런던의 남동부에 위치한 다트퍼드에서 선거가 열렸는데 다트퍼드는 노동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산업 지역으로 노동당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1920년대 이후 영국 정치는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양분화 되어 있었다.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상류층의 지지를 받고 국가 제도와 애국심을 중시했고 노동 계층인 진보적 지식인의 지지를 받고 평등과 기회균등을 중시하던 노동당이었다. 

 

마거릿 대처 낙선

이런 시기 24살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 후보로 뽑히게 된다. 후보로 뽑힌 마거릿 대처는 예쁜 미모로 주목을 받았고 당시 여성의 정치소외 분위기로 인해 여성 유권자들에게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남성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남성클럽에 종업원으로 취직해 일을 하며 유세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마거릿 대처는 낙선한다. 

 

이후 마거릿 대처는 데니스 대처를 만나결혼하게 된다. 데니스 대처는 농수산업과 관련된 화학약품, 페인트등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의 총지배인으로 상당한 재력가였다. 

 

 

정치인으로 입문 

이후 아이 둘을 출산하고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한다. 1959년 다시 총선이 열리고 그녀는 핀칠리 지역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한다. 이 지역은 1924년부터 1959년까지 35년동안 보수당이 패배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마거릿 대처도 대승리를 거두며 정치인으로 들어서게 되고 처음 의원에 선출된지 2년 후 1961년 36살에 연금 및 국민 보험부의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었고 보수당 안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게 된다. 그리고 1970년 45세에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다. 

 

마거릿 대처 교육부 장관 시절

마거릿 대처가 교육부 장관이었을때 영국의 경제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영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최강대국이라고 불리던 자부심과 명성을 미국에게 빼앗긴 상황이었다. 조선업 1위 타이틀도 일본에게 빼앗기고 높아진 물가로 인플레이션이 상승했고 노동 생산성은 저하되어있었다. 그로 인해 영국병이 만연하게 되었다. 영국병의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의 고질적인 파업이었다. 

 

이로 인한 당시 영국 정부의 심각한 재정난 때문에 교육부 예산을 대폭 삭감해 버렸고 이에 마거릿 대처는 아동들의 우유 무상 급식을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영국 전역에 마거릿 대처에 대한 폭발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마거깃 대처 총리되다. 

그러나 마거릿 대처는 당대표에 출마해 선출되고 이때 마거릿 대처의 나이는 50세였다. 영국 최초의 여성 보수당 당대표가 된 것이다. 

 

50세의 나이에 부수당 당대표

 

 

영국 총리 선출 방식 

영국의 정치인에게 당대표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 영국 정치의 최고 수장인 총리인데 영국은 총리 투표를 따로 하는 것이 아닌 총선을 통해서 당이 승리를 하게 되면 승리한 정당의 당대표가 자동으로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대처가 당대표가 된 4년 후 1979년 5월에 총선이 열리게 되고 마거릿 대처는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유세를 했다. 한손에는 1974라고 적혀있고 다른 한 손에 1979년이라고 적힌 장바구니를 보이며  1974년에 비해 물가가 많이 올렸다는 것을 보여주며 자신의 주부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전략이었다. 

 

장바구니 유세

 

 

마거릿 대처는 왜 철의 여인이 되었나? 

대처에게 처음으로 철의 여인 별명을 지어준 것은 소련이었다. 대처가 당대표를 하던 시절 군사력을 증강하는 소련 정부를 맹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소련의 군사잡지에서 마가릿 대처를 비난하는 기사를 내놓았고 그 기사의 타이틀이 바로 '철의 여인 위협을 휘두르다'였다. 이 기사가 영국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이 기사를 본 대처의 반응은 오히려 좋아했다. 

 

마거릿 대처는 이 기사의 타이틀을 총선에 이용하며 자신이 위기에 빠진 영국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임을 어필했다. 

 

철의 여인 이미지를 사용한 다음달 그녀의 지지율은 약 7%가 상승했다.  그리고 마침내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영국의 최초 여성 총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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