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24 ]
율곡 이이(1536~1584)
율곡 이이의 고향은 강릉이 분명하지만 선대로 부터 살아왔던 고향은 파주 율곡(밤나무골) 이다. 그래서 이이의 호는 율곡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13살에 과거를 통과한 천재학자이다. 율곡 이이는 조선에서 전무후무한 구도장원한 인물로 과거 시험에 9번이나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과거시험은 2단계로 이루어 지는데 소과, 대과로 이루어졌는데 그런 시험을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율곡 이이 공부비법
율곡 이이는 학문에 처음 입문하는 학자들을 위해 격몽요결에 자신의 공부법을 적어놓았다.
율곡 이이 가출하다.
율곡 이이가 성균관에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의 놀림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율곡 이이가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이유였다. 1944년 그는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돌연 금강산으로 가출을 한다. 절에 들어가 불경에 심취했는데 가출 3년전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후(=어머니 무덤을 지킨 후) 1년 동안 절에 들어가서 마음을 달래며 수양을 했다. 또한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가출했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이었다. 원래 성균관에 입학하자마자 공자의 초상이 있는 대성전에 들려 공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공자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자 성균관 유생 중 한명이 이이를 중=스님이라고 흠을 잡아 공자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래침학 거부한 이이
고려 말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낙하산으로 관리가 되자 이들의 교만함을 꺽기 위해 신입 관리들의 신고식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해지면서 신입관리들에게 가혹 행위가 이루어졌다. 선배들이 술과 안주를 비상식적으로 과하게 요구했고 의복을 망가뜨리고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등 가혹 행위가 심했는데 이를 이이는 거부하며 신래침학의 폐지를 요구했고 14대 왕 선조는 이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래침학을 금지했다.
율곡 이이의 개혁안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율곡 이이는 개혁의 포부를 가졌던 것 같다. 율곡은 공납(특산물 납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공납을 쌀로 납부하는 대공수미법을 제안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을 제안했는데 특히 서얼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요직으로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진족 침략 시 노비 면천을 시켜 군사의 수를 늘리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이이는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선조는 끊임없이 이이에게 관직을 제안했다. 율곡은 관직에 나갔다가 실망하고 사직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개혁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동호문답><만언봉사><성학집요> 같은 이론서를 집필하면서 관료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이론서를 쓴 관리도 드물었다.
이이는 사직을 할때 선조에 대한 직언을 서슴없이 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1592년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율곡이이 사망후 제자들의 행장이나 연보등에 등장한다. 최근에 10만이 아니다 등의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율곡 이이는 누구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군정 개혁을 제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율곡이 제시했던 군량확보, 군사확보책이 실질적으로 유용하게 활용이 되었다.
1583년 9월 이이는 이조 판서를 맡게 된다. 그러나 이조 판서직을 맡은 지 4개월 만인 49세에 세상을 떠난다. 이이는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청렴하게 생활을 해서 장례식때도 장례 비용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조선 후기 율곡 이이를 계승한 서인들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율곡 이이가 주장했던 대공수미법은 대동법으로 자리잡게 되고 군정의 개혁 또한 균역법으로 실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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