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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강릉 오죽헌 속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아이콘?

by 짱신나^^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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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2회 2]

 

오늘의 탐사지: 강릉 오죽헌

주제: 신사임당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오죽헌

오죽헌 전체 전경

 

세계 최초로 엄마와 아들이 화폐 인물로 선정
구 오천원 권 지폐의 그림이 오죽헌 전경이다.

 

입구 안쪽에 들어오면 오죽헌과 문성사 건물이 바로 보인다.
문성사 건물  왼쪽 옆에 오죽헌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을 오죽헌이라 부른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이이를 낳았다는 몽룡실이 있다.

 

 

 

오죽헌이라 불리는 이유 

오죽헌 주변에 검은 대나무 오죽이 자란다고 해서 오죽헌이다.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본명 신인선

 


신사임당의 어린 시절 
신사임당의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암기)할 만큼 똑똑했다. 또한 그 학문을 바탕으로 시.서.화에 능했던 예술가 사임당이다.

 

 

 

시인이자 서예가 , 화가이기도 했던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 최고의 여류 화가로 이름을 알렸고 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로 기억하지만 사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여성으로는 흐물게 호가 있었다.  신사임당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부모님은 명문가의 강릉 부자였다. 

 

 

조선시대는 아들로 태어나면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나가야 했고 여자로 태어나면 시집을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조선에 태어난 사임당이 일반 서민 집에서 태어났다면 자수 놓고 끼니 차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임당의 부모는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주기 시작한다. 7살때 사임당은 자수 놓은 어머니를 보고 그림에 눈을 뜨게 되고 따라서 자수를 잘 할만큼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 부터 남달랐다. 

 

 

풀, 벌레를 그림으로 그리는데 눈 앞의 꽃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꽃 위의 나비가 화선지 속에서 날아다니는 그림을 그리는 사임당을 보고

 

 

 

깜짝 놀란 부모는 사임당에게 안견의 그림책을 사다주었다.

 

조선 후기에 김홍도가 있다면 조선 전기에는 안견이 유명했다. 아버지는 열린 마음이여서 딸도 남자와 똑같이 공부해야 함을 강조하며 자신이 가진 재능을 펼쳐 나라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견의 그림을 스승 삼아 예술의 세계를 키워나간 사임당이다.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사임당의 뛰어난 재능은 남편 입장에서 너무 비교가 되었다. 아이들 교육 뿐만아니라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그림에도 너무 재능이 뛰어난 아내를 보며 할수 있는게 없었던 남편은 사임당의 그늘에 가려져 노심초사했던 남편 이원수였다. 남편 이원수 역시 과거 준비를 하지만 과거에 줄줄이 낙방하고 게다가 의지도 약해 신사임당의 잔소리를 많이 듣기고 했다는 율곡 이이의 신사임당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행장이란? 죽은 사람이 걸어온 길을 적은 글이 행장인데, 어머니, 외조부,모 등의 행장을 쓴 이이지만 아버지의 행장은 없다. 않쓴건지 없어진건지 알수는 없으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율곡전서>

0123

 

오직 이이가 쓴 신사임당의 행장 그 끝에 아주 조금 기록되어 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아이콘이다?
 
신사임당이 좋은 부모는 맞지만 조선에서 바라는 좋은 아내는 아니었다. 신사임당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만든 사람은 조선 후기 문신 우암 송시열이다. 

 

 

서인 계열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심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가 스승이였다. 조선 후기에 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서인 계열과 이황을 모시는 남인 계열이 급부상했고

  

 

당시 서인의 대표가 우암 송시열이였는데 서인 세력을 결집시킬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율곡 이이 띄우기였다. 그래서 그의 부모부터 신성하게 만들어야 했기에 당찬 여성으로서의 신사임당의 모습은 조선시대 그들에게 맞지 않는 어머니 상이였기에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아내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자신들이 원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맞춰 신사임당을 포장한 것이다. 이미 화가로 유명했던 신사임당인데 당시 유행했던 산수화 또한 굉장히 잘 그렸다.

 

 

 

 

그러나 여성이 너무 전문적인것을 꺼려했던 시대라 그들이 원하던 여성상이 아니였기에 사임당의 산수화는 무시하고 사임당의 <초충도>를 높이 평가했다.

 

 

 

풀. 벌레등 아기자기한 그림의 <초충도>가 그들이 생각한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송시열은 시암당의 산수화를 위작으로 선포한다. 그렇게 사임당의 산수화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960년 6.25 전쟁 이후 국난극복을 위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해야했던 시대였기에 여성들의 힘을 동원하기 위한 명분으로 다시한번 신사임당이 부각되었다.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이 아닌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것이 중요했기에 이렇게 훌륭한 유교적 여성의 신사임당에게서 율곡 이이가 탄생했다는 신격화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조선 시대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둬두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었다. 이제는 현모양처로서의 국한된 이미지가 아닌 능력있는 여자를 넘어 재능있는 예술가 신사임당으로 다시 평가를 해야 한다. 



62회 계속 ▼

 

 

어우동 이야기/고려시대 여성 지위->조선 시대 여성의 삶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허난설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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