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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름반도 합병 과정(벌거벗은 세계사 44-2)

by 365 ^^ 2022. 5. 3.

[이전내용 /벌거벗은 세계사 44-1]

 

러시아 우크라이나 기원 /페레야슬라프 조약 (벌거벗은 세계사 44회 )

우크라이나 유럽의 빵바구니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세계 5대 곡물 수출국에 속하는 우크라이나는 체르노좀, 초르노젬이라 불리는 '검은색 흙'이라는 뜻으로 기름지고 유기물 함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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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름반도 합병 과정

 

세계 최초 사회주의 국가 탄생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약 200년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고 1917년에 뜻밖의 독립의 기회를 갖게 된다. 견고해 보이던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세력이 10월 혁명,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게 되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며 소련이 탄생했고 이때 우크라이나에선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거세졌다. 1917년 11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해서 만든 최초의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국민 공화국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고 1918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패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초창기 회원국으로 우크라이나는 참여하게 된다. 그 뒤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약 70년을 함께 했던 두나라이다. 

러시아가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는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극구 민족주의 세력=네오나치가 반러시아 감정을 부추긴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반러시아 감정은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가 있다.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소련은 산업화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집단 농장 체제를 도입했고 집단농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산업화를 이루고자 했던 소련이다. 이때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우크라이나를 휩쓴 엄청난 대기근 홀로도모르였다.  당시 사망자는 약 700~1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홀로도모르 내용 알아보기) 스탈린을 통해 본 소련 역사 ~ 피의 대숙청

 

스탈린을 통해 본 소련 역사 ~ 피의 대숙청 [벌거벗은 세계사 32-1]

스탈린은 20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소련의 정치인이자 소련 최고의 독재자이며 소비에트 연방 수립에 일조하고 장기간 소련을 통치했던 독일 히틀러와 라이벌이었던 인물이다. 스탈

jangane.tistory.com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에 의한 학살 

소련의 정책에 우크라이나인들의 불만이 치솟아가던 상황에 극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편에 서서 나치가 했던 일을 대신 수행했다. 그것은 바로 우크라이나 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영. 유아 혹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끔직한 학살이었다. 독립이란 명분 아래 소수민족과 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이었다.

 

스테판 반데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의 지도자


특히 우크라이나 서부 볼린 지역의 경우 유대인 주민 약 98%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극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는 나치의 반소련 정책에 동조하면서 순수한 우크라이나인의 단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인을 못살게 군 다른 민족은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우크라이나에 살던 폴란드인 약 10만 이상을 학살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우크라이나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차지하려는 이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시도는 또다시 실패하고 우크라이나는 반소련 정서와 유대인 및 소수민족 학살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의 민심을 달래줄 선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크라이나 침공의 빌미를 준 역사이다.

 

러시아가 언급한 크름반도는 절대 포기할수 없는 땅으로 보고 있다. 사실 크름반도는 18세기부터 러시아의 땅이었는데 과거 소련의 지도자 3인이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늘려줬고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가 그 땅 그대로 독립을 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654년 페례야슬라프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확장이 되는데 레닌이 오데사를 포함 러시아가 차지했던 동남부지역을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주고 스탈린 또한 르비우를 포함한 서부지역을 우크라이나에게 양도, 1954년 흐루쇼프가 친선과 민심 수습을 위해 크름반도를 양도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소련시절에 우크라이나 영토를 넘겨준 이유는 단순했다. 행정 편의상 관리가 용이하고 소비에트 연방이란 하나의 체제에 속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넘기는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연방이 모두 독립을 하게 된다. 이때 1991년 우크라이나도 독립을 하게 된다. 

 

 

크름반도 병합

시간이 흐르면서 크름반도가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부각됐고 특히 크름반도 남서부 세바스토폴은 소련 시절부터 흑해 함대의 핵심 군사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우호,협력 동반자 조약을 통해 2042년까지 세바스토폴 항구에 러시아 해군 약 10만 명이 주둔 할수 있게 됐고 협정 이후 자연스럽게 크름반도에서 러시아 이민자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는 2042년까지 주둔한다는 협상을 깨고 아예 이곳을 점령해버린다. 크름반도 침공 당시 러시아군이 아니 척하기 위해 모든 표식을 제거하고 위장을 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했다. 그러 나 지금까지 EU와 미국은 크름반도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우크라이나도 역시 부인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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