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6.47회]
오늘의 탐사지: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주제: 독도 지킴이 안용복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울릉군 북면 석포길 500
안용복은 누구인가?
안용복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호패에 쓰여진 기록을 보면 오충추의 사노비로 기록되어 있고 키는 146cm 정도로 작은 키에 얼굴이 검고, 검버섯과 수염이 있고 흉터는 없는 얼굴로 호패에 기록되어 있었다.
거주지는 부관 좌천리 왜관 근처로 왜관을 드나들어 일본어를 잘 구사했을 것으로 추청된다.
안용복은 외거 노비로 어업 분야에 종사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안용복 피랍사건
안용복 사건에 대해 일본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조선 숙종 때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안용복 등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탄 배가 을릉도 해안가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달려드는 일본인들은 급기야 박어둔이라는 조선인을 납치해 일본인 배에 태우자 안용복은 박어둔을 구하기 위해 올라탔다. 일본인들의 배는 둘을 태운 채 출발했고 안용복, 박어둔을 납치해 안용복이 처음 일본으로 가게 된 계기는 피랍(=납치)이었다.
피랍 이유
일본에서 지방관들이 수산물을 많이 잡아오라고 했는데 어획량이 적은 것을 일을 하지 않 는 것으로 의심하자 조선 어부들이 물고기를 싹쓸이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급기야 사실 확인을 위해 조선 어부 납치를 계획하고 실행해 옮긴 것이다.
일본 측 기록에 묘사된 내용은 안용복은 납치된 상황에도 오히려 호통을 치며 우리 땅임을 당당히 주장하니 일본은 이 일로 조선 측에 정식을 사신을 보내고 안용복 등은 부산 왜관으로 송환되고 울산 수령,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숙종에게 까지 보고된다. 조선과 일본은 서계(외교문서)를 주고 받으며 진상 조사를 하는데 당시 일본 측 주장은 우리 다케시마에 불법으로 조업 했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주장 하고 울릉도라는 말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다.
울릉도 쟁계 (경계를 가지고 다투다)
이에 숙종은 끝까지 지우지 않고 서계(외교문서)에 '울릉도' 세 글자를 끝까지 지킨다. 그래서 안용복은 우리땅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들에게 납치었다고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숙종실록 기록
그러나 안용복은 조선에서 내린 해금정책(먼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하다)을 어기고 울릉도에 다녀왔기 때문에 2년 형을 선고 받는다.
일본 중앙 정부 측은 돗토리 번에 울릉도가 누구 관할인지 묻는데 안용복 피랍사건 2년 뒤 1693년<돗토리 번 답변서>에 다케시마는 조선땅이라고 답변이 온다.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 임이 정확히 기재된 일본 내에서의 역사적 자료이다.
안용복의 이런 용기 있는 주장이 오늘날 독도가 우리땅임을 일깨워주는 자료를 마련한 것이다.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
1696년 1월 28일 답변서 이후 일본 정부에서 내린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내려진다.
이 문서 자체가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 전
울릉도 해안에서 어업을 하던 일본의 두 가문들은 울릉도 도해 허가를 받아 어업을 했는데 이들에게 도해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울릉도에서 고기잡이가 금지되자 독도로 가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독도에서 조업을 하니
오야가문의 문서 중 1660년 당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임을 인정하는 내용이 "다케시마 (울릉도)안의 마쓰시마(독도) 하나다." 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도 계속 일본 어부들이 도해를 해서 울릉도에서 불법 조업을 하니 도해 금지령이 일본 전역에 내려진다.
안용복 장군 덕분에 도해금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안용복의 두 번째 도해
그 후에 1696년 안용복은 사람들을 모아 울릉도,독도 불법 침입을 감시하러 떠났다. 당시 울릉도,독도 주변에 강치가 많이 서식했는데
강치 사냥을 위해 섬 주변에 자주 나타났었던 일본인들이 사냥한 강치를 끓이고 있던 것을 본 안용복은 그들을 큰소리로 꾸짖고 배를 타고 뒤쫓았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가죽신,검은 관복, 갓까지 쓰고 스스로 조울양도감세장인 울릉도,독도의 세금 거두는 일을 감독하는 책임자다. 라고 하고
일본 호키로 건너간 안용복은 호키의 관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지만 안용복은 일본에서 추방되고 동일 범죄에 공무원 사칭까지 더해져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심한 처벌을 거두어 달라는 조정 대신들의 건의로 유배형으로 감형된 것까지만 기록에 있다.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등의 그 후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안용복을 언급하며 칭송을 하는 부분이 있다.
천한 계급인 사노비 안용복이었으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마음 앞에선 신분 계급은 큰 의미가 없기에 안용복은 1950년 후대에 장군으로 추존된다.
대마도는 조선땅이다 !
사실 대마도가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좀 더 가깝다.
조선 시대에 대마도는 독립적인 국가이지만 양 나라의 눈치를 봐야 했던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인들이 살았다.
신라 시대 후 고려 시대에도 대마도는 고려에 속국 개념으로 조공을 바친다. 신라와 고려를 지나 조선 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되는데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살아 생전 양위를 하게 되고 4년간 군권을 쥐고 있었던 태종은 세종 원년에 직접 대마도 정벌을 시작한다. 그리고
태종이 쓴 '정대마도교서'
대마도는 본디 우리땅인데 왜적의 소굴이 되어 왜인이 우리 땅을 약탈하고 과부를 만들어 내고 집을 불태우는 등 흉악무도한 짓을 하니.... 이에 태종은 이종무를 앞세워 대마도를 초토화 시켜버린다. 130여 척의 선박을 노획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그 이후 대마도는 확실한 조선땅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에 정세를 보니 일본이 더 우위라고 생각해 일본 쪽으로 가게 되고
1871년 대마도는 나가사키 현 부속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성됐다. 현재는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대마도는 조선에 속해 있었다.
3부 계속...
독도는 우리땅 관련 내용 ▼
☞(독도 박물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과 일본 독도 편입과정 (3부)
☞ 독도는 우리 땅 역사 in 독도/스캐핀문서 677호/독도 삽살개(4부)
☞수많은 사료들이 증명하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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