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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독도 박물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증거들과 일본 독도 편입과정 (3부)

by 짱신나^^ 2020.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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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7회]


오늘의 탐사지: 독도 박물관 (울릉도위치)

주제: 독도는 우리땅 
출연자: 설민석 



독도박물관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581-1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 일기 

1696년 안용복 사건으로 일부 어업 가문에게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이 내려지고 그래도 일본 어부들에 계속해서 조업을 하니 1837년이 되면서 일본 전역에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내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불법 어업을 하는 일본 어부들 때문에 1882년 울릉도로 검찰사를 파견한다. (검찰사란 조선 시대에 군사상 중대한 일을 살피기 위한 임시 관직으로) 고종의 명으로 파견된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1달 동안 울릉도 검찰 일기를 쓴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현황과 일본의 불법 침입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울릉도로 검찰사 이규원을 보낸 이유는?

400여 년간의 쇄환정책(울릉도에 가는 것을 금함)으로 비어 있던 울릉도에 오히려 개척민을 이주시켜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는 일본인들을 막는 것이 계획이었다. 

 
1883년에 2차례에 걸쳐 16 가구 54명을 울릉도에 이주 시켰는데도 계속 불법 조업하는 일본인들
1900년대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변화 황제의 명은 칙령 

 고종 황제는 <칙령 제41호>를 반포한다.


독도의 날 

1900년 10월 25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10월 27일 관보에 게재했다. 10월 25일 이날은 현재 독도의 날인 10월 25일의 밑바탕이 된다. 


고종의 <칙령 제41호> 내용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것


칙령 제 41호에서 말하는 석도란? 

우리는 석도가 독도임을 주장


일본의 주장 
칙령 속 석도는 관음도다. 그래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했다. 

우리측 반박

관음도는 온통 나무로 가득한데 어떻게 돌섬이냐


반면 독도는 한눈에 봐도 완전 돌섬이다. 


석도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조선후기 전라도 거문도 어부들이 거문도에서 남해안을 건너 돌아서 울릉도까지 많은 이동을 하며 수산업에 종사를 했는데 전라도 사투리로 돌이 '독'이다. 경상도 사투리 또한 마찬가지 

1882년 울릉도 개척 이전부터 조선인들은 독섬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38년 최초로 발행된 <조선어사전>에서는 '독'은 돌의 사투리다 라고 풀이되어 독다리(돌다리)> 독고개(돌고개) 등이 널리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

칙령 발표 후 5년 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독도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일본에 의해 병탄이 되는데 일본의 독도 편입은 한 인물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바로 일본의 어업가 나카이로 사업가이다. 


그는 독도에서 강치를 남획한 주범이었다. 


독도의 상징이었던 강치를 기름,가죽등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고 수익이 커지자 늘어난 일본인 경쟁자들를 때문에  나카이는 일본 내무성에 독도를 일본에 편입 시켜 자신에게 10년 간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일본은 러일 전쟁(1904~1905)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독도를 편입 시키고 나카이에게 독점권을 줄 경우 국제 여론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한 일본 내무성, 그래서 바로 외무성으로 찾아가 정무 국장에게 요청한다.

그래서 외무성은 이를 수락하고 독도 편입을 결정한 명분은 1904년 1월 21일 엄정 중립을 선언한 대한민국, 같은 해 2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은 1904년 2월23일 한일 의정서를 강제 체결했고 한일 의정서에 보면 

러일 전쟁 중 독도는 군사요충지에 있던 '군략상 필요 지점' 이를 명분 삼아 군사적 요충지로 교묘하게 편입을 해버린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로 독도 편입을 공시하고 나카이도 독도 10년 독점권을 받아 강치를 도살하기 시작한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독도 편입을 모르고 있었다. 사전 동의는 물론 통보도 없이 일본의 시마네 현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한 것이다. 

이 내용을 어디에도 알리지 않고 내부 회람으로만 공시한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조선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2005년에는 시마네 현 편입일인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진 건 1년 뒤 1906년 3월 28일 40여 명의 시마네 현 관리들이 울릉도의 당시 이름 울도 군수 심흥택을 찾아와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 차 내도 했다고 말한 일본 관리들, 그들의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던 울도 군수 심흥택은 이 내용을 황제에게 알린다.  


을사 오적들의 반응도 아연실색 했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대나무가 많은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고 불렀고 소나무는 없지만 일본에서 대나무와 형제 격이기에 독도를 송도(마쓰시마)라고 불렀는데 시마네 현 고시 이후 독도 편입 시기에 갑자기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이 바뀌어 버려 독도를 '다케시마' 로 부르게 되었다.  


일본의 주장 


일본은 이미 일본의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1846년 그려진 '일본여지노정전도'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지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측 반박 

 

일본여지노정전도 (1779년) 초판에는 독도가 조선 땅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개정판에 일본 땅으로 색칠을 해 놓은 것이다. 초판 지도에는 색칠이 되어 있지 않다. 



그 후 일본의 반응은 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 외부성 공식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해적판 지도.


강치의 비극 

바다 사자의 일종인 강치를 1904년도부터 남획을 하기 시작했다. 독도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 강치들의 먹이가 풍부하고 바위들이 많아 강치가 서식하기에도 알맞았던 독도다. 당시 독도에 서식하던 1만 6천여 마리의 강치들이 있었는데 일본 어민들의 손에 남획되어 강치들의 피로 새빨갛게 물이 들었고 그렇게 죽인 강치에게 기름과 가죽을 얻었다.


새끼 강치는 서커스에 이용해 독도에서 강치의 씨를 말렸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들이 사냥한 강치를 일본의 친구로 묘사하며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독도의 강치는 멸종이 되었는데 친구로 묘사하다니...


 

삽살개 
일본에 의한 또 다른 피해종



우리나라 토종견 3인방(풍산개,진돗개,삽살개) 중 하나 인 삽살개는 호랑이에게 덤빌 정도로 용맹했던 동물로 묘사되는데 일본은 전쟁 막바지 1940년 즈음 해서 가축증식계획을 수립하고 우리나라 가축 약탈을 위해 삽살개를 도축하여 가죽(침낭으로 사용)과 고기(식용을 위해)를 수탈한다.


도살 된 토종개는 약 150~200만 마리가 넘었고 삽살개의 가죽과 살을 분리해서 지붕에 널었는데 가죽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하고 결국 토종 삽살개는 멸종하고 지금은 간신히 그 혈통을 이어가는 중이다. 


독도 삽살개의 의미


강치와 토종 삽살개는 일본에 의해 학살 멸종되었고 그런 강치는 모형은 독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고 삽살개는 독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단순히 독도에서 기르는 게 아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삽살개이다. 





4부 계속..


독도는 우리땅 관련 내용▼


독도는 우리 땅 역사 in 독도/스캐핀문서 677호/독도 삽살개(4부)


수많은 사료들이 증명하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1부)


 안용복과 울릉도 쟁계 in 안용복 기념관/대마도는 조선땅!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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