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7회]
오늘의 탐사지: 독도 박물관 (울릉도위치)
주제: 독도는 우리땅
출연자: 설민석
독도박물관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581-1
울릉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현황과 일본의 불법 침입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울릉도로 검찰사 이규원을 보낸 이유는?
400여 년간의 쇄환정책(울릉도에 가는 것을 금함)으로 비어 있던 울릉도에 오히려 개척민을 이주시켜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는 일본인들을 막는 것이 계획이었다.
독도의 날
1900년 10월 25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10월 27일 관보에 게재했다. 10월 25일 이날은 현재 독도의 날인 10월 25일의 밑바탕이 된다.
우리는 석도가 독도임을 주장
반면 독도는 한눈에 봐도 완전 돌섬이다.
석도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조선후기 전라도 거문도 어부들이 거문도에서 남해안을 건너 돌아서 울릉도까지 많은 이동을 하며 수산업에 종사를 했는데 전라도 사투리로 돌이 '독'이다. 경상도 사투리 또한 마찬가지
칙령 발표 후 5년 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독도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일본에 의해 병탄이 되는데 일본의 독도 편입은 한 인물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바로 일본의 어업가 나카이로 사업가이다.
러일 전쟁 중 독도는 군사요충지에 있던 '군략상 필요 지점' 이를 명분 삼아 군사적 요충지로 교묘하게 편입을 해버린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로 독도 편입을 공시하고 나카이도 독도 10년 독점권을 받아 강치를 도살하기 시작한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독도 편입을 모르고 있었다. 사전 동의는 물론 통보도 없이 일본의 시마네 현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한 것이다.
이 내용을 어디에도 알리지 않고 내부 회람으로만 공시한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조선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2005년에는 시마네 현 편입일인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대나무가 많은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고 불렀고 소나무는 없지만 일본에서 대나무와 형제 격이기에 독도를 송도(마쓰시마)라고 불렀는데 시마네 현 고시 이후 독도 편입 시기에 갑자기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이 바뀌어 버려 독도를 '다케시마' 로 부르게 되었다.
일본의 주장
일본은 이미 일본의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1846년 그려진 '일본여지노정전도'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지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측 반박
그 후 일본의 반응은 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 외부성 공식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해적판 지도.
바다 사자의 일종인 강치를 1904년도부터 남획을 하기 시작했다. 독도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 강치들의 먹이가 풍부하고 바위들이 많아 강치가 서식하기에도 알맞았던 독도다. 당시 독도에 서식하던 1만 6천여 마리의 강치들이 있었는데 일본 어민들의 손에 남획되어 강치들의 피로 새빨갛게 물이 들었고 그렇게 죽인 강치에게 기름과 가죽을 얻었다.
새끼 강치는 서커스에 이용해 독도에서 강치의 씨를 말렸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일제에 의해 독도의 강치는 멸종이 되었는데 친구로 묘사하다니...
도살 된 토종개는 약 150~200만 마리가 넘었고 삽살개의 가죽과 살을 분리해서 지붕에 널었는데 가죽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하고 결국 토종 삽살개는 멸종하고 지금은 간신히 그 혈통을 이어가는 중이다.
4부 계속..
독도는 우리땅 관련 내용▼
☞독도는 우리 땅 역사 in 독도/스캐핀문서 677호/독도 삽살개(4부)
☞수많은 사료들이 증명하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1부)
☞ 안용복과 울릉도 쟁계 in 안용복 기념관/대마도는 조선땅!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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