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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아편전쟁 (Opium War) 이야기

by 365 ^^ 202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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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노려온 최대 시장 중국의 문을 열기 위한 싸움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선봉에 서게 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무역을 하기원했던 중국이였기에 나라별로 허가된 제한된 지역에서 무역을 허용하고 있었다. 청의 해금정책으로 서구 열강을 위한 무역항으로 광저우로 단 한곳만 개방했다.   

 

당시 '광동 13행'을 두어 청나라 상인 단체를 선정해 외국 무역 독점권을 주고 이들이 세관을 대신해 세금을 징수 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제한된 양와 제한된 품목만 교역하도록 했고 이런 청의 무역통제에 영국동인도회사는 심기가 불편해진다. 

 

 

 

아편전쟁의 배경 

 

영국은 당시 청나라(중국)에 물건을 원했는데 중국산 비단, 도자기 등에 열광했던 영국이었고 그 중에 중국의 차가 영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고 막대한 양의 중국 차를 수입하고 있는 영국이었다. 약 100년(1700~1800년대)동안 영국의 중국차 수입량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았다. 

 

당시 차를 살때 중국은 지정은제에 따라 은을 화폐처럼 쓰던 중국이었고 영국은 은을 주고 중국에서 차를 구입해야 했는데 영국은 주요 수출품인 모직물을 중국에 모직물을 팔면 비슷하게 무역이 이루어질거라 생각했지만 당시 청나라의 광저우는 더운지역으로 모직물 수입품이 필요 없었고 중국은 풍족한 시대였기 때문에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나라이다. 그래서 영국이 낸 아이디어가 아편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꼼수로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고 초기에는 주로 중국의 상류계층이 사용했던 아편이었다. 황실 귀족, 환관, 상인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학생등 지루함이나 정신적 중압감을 격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던 아편이었는데 영국에서 아편 가격을 대폭인하하고 수출량을 극대화해 중국으로 다량 유입된다.

그렇게 청나라의 은이 아편 대금으로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 온 것이다. 아편을 한번 사게 되면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물건이였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아편에 중독된 청나라

그렇게 중국에 다량의 아편 유입에 의해 아편 중독자들이 속출하게 되고 1840년에는 수입된 아편이 약 2500톤으로 당시 중국 인구8억명이였는데 약 8억3천명 인구가 동시에 흡입하고도 남는 양이었다. 이렇게 서양에서 들어온 마약인 아편으로 인해 중국의 백성들은 병들게 되고 영국은 중국산 차로 인해 생긴 무역 손해를 아편 판매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중국과 영국의 아편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 되었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말기로 들어서면서 빈곤한 시대가 도래하게 되고 식량 부족과 더불어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도 관리를 하지 못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 가던 중이었다. 이런 시기에 아편을 흡입하면 굶주림을 잊을 수 있었고 고통스러운 눈앞에 현실을 잠시나마 있게 해주는 달콤한 유혹에 못이겨 아편에 중독돼 버린 청나라였다.

 

임칙서의 등장

계속 증가 하는 아편 수요로 인해 아편 밀수 또한 증가하게 되고 9차례에 걸쳐 아편 금지령을 반포했지만 아편의 중독성은 베이징까지 번지며 아편 밀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중국이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아편 중독의 상황 속에 임칙서(린쩌쉬) 가 등장한다.

 

임칙서 (=린쩌쉬)

임칙서는 아편 밀수를 근절하기 위해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아 흠차대신(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은자)으로 1838년 광저우에 파견되었고 서양상인들에게 아편밀수 금지 각서 및 아편을 모두 몰수하고 아편을 거래하는 자들을 사형을 시켰다.

 

몰수한 아편 약 2만 상자분량은 20일 동안 석회를 섞어 바닷물로 중화시킨후 바다에 버렸다. 임칙서의 강경책으로 아편을 단속하자 아편 무역의 위기를 느낀 영국은 청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청나라는 아편 전쟁의 책임을 물어 린쩌쉬를 파면, 유배에 처했다. 

 

 

 

1차 아편전쟁 (1840년 6월 ~1842년)

영국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아편 전쟁은 제 1 차 아편전쟁때 영국은 텐진까지 북상하며 청나라를 위협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은 앞에서 처참하게 중국에 군대는 쓰러져 갖고 결국 영국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중국은 영국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 문턱까지 온 영국군에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불평등조약(난징조약 1842년)을 맺는다. 전쟁 이후에 아편 거래가 합법화 되었다.

 

난징조약(=텐진조약)

사상초유의 불평등조약 체결되었고 홍콩 섬을 할양 (지리적 접근성이 탁월한 천혜의 항구)하게 된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

기독교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조직인 '태평천국'이 일으킨 약 14년간의 대규모 내전으로 청나라 타도, 농지 균등 분배 등 사상 종교 정치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이었다.  역사상 가장 사람이 많이 죽은 내전이었다. 

 

2차 아편전쟁 

1857년 영국은 기대만큼 수익이 돌아오지 않자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당시 중국이 몰래 아편을 생산 영국의 무역역조 현상에 일조) 

 

 

애로호 사건

1856년 청나라 관원이 광저우에 정박한 애로호의 중국인 선원들을 해적 혐의로 체포하러 갔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의 상선이었고 선장만 영국인이었는데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 억지를 쓰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중국은 선원을 풀어줬으나 온갖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켰다. 

 

2차 아편 전쟁때는 미국, 러시아 교섭에만 참여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프랑스는 자국민 선교사가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1860년 약 2만 병력의 영프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 후 청나라는 패전한다.

 

 

2차 아편전쟁 결과

2차 아편전쟁 승리 후 구룡반도까지 할양, 10개의 항구가 개항이되고 기독교 포교의 자유및 아편 무역의 합법화가 되었다. 이렇게 서양 열강에 패배를 일삼게 되니 "서양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나 군수기술 중심의 근대화 운동 및 정치, 사회 전반 낡은 제도를 개혁하자는 변법자강운동의 개혁이 일어나지만 약 30년간의 근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 양국의 무력 충돌인 청일전쟁(1894년~1895년)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청나라의 무력함을 다시한번 전세계에 알리게 된것이다.  

 

 

아편전쟁이 조선에 미친 영향 

아편전쟁 이후 1980년  아편 중독자의 수는 약 4천만 명에 달했고 이 아편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편전쟁 소식이 조선까지 전해지면서 <세종실록> 지리지에 등장한 양귀비에 대한 기록이 있다. 

  1. 약재로 쓰인 식물
  2. 국가 간 예물로 쓰인 귀한 식물
  3. 동의보감에도 나와있지만 양귀비를 많이 사용하면 안된다고 주의할 점을 기록해놨다.

병인박해 (1866~1871)

중국의 패배를 보고 조선은 "서양을 배척하자" 는 천주교 탄압이 강화되어  흥선대원군때의 조선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개항 후 

개항을 하면서 조선에도 조계지(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치외법권 지역)가 형성된 후 많은 상인들이 몰리게 되고 자연스레 아편도 다량유입된다.  아편을 막지는 못했지만 조선은 이 상황을 예상을 해서 강화도 조약이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아편 수입금지 조항을 삽입했다. 그러나 뜻대로 아편 수입금지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조선의 상황이었기때문에 조계지와 외국상인을 중심으로 아편이 퍼지기 시작했다. 거래된 아편의 양은 무려 3만여 명이 흡입할 수 있는 양이었다.

 

당시 수도 한성에는 40여 개의 아편 판매소가 있을 정도로 심각했던 상황이었다.  당시 아편의 위험성을 알리는 신문 글들이 등장했었고 아편이 조선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편에 대한 심각성으로 인해 처벌을 12년 에서 15 년으로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

아편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의 임진왜란 연구를 시작으로 대륙 침략의 야욕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에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서양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은 기회를 잡게 되고 부상자 치료, 수술 등에 필요한 모르핀 대량 생산을 국가 차원에서 계획하게 된다. 

 

이에 양귀비 재배를 위해 우리나라를 선택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에 양귀비를 제배하게 되고 1920~30년대에는  조선에도 아편굴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편굴: 아편을 흡입하기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

*주사옥:  모르핀 주사를 맞는 곳  

*자산귀: 모르핀 주사 중독자 

 

전쟁이 끝나고 대량생산되었던 모르핀들이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모르핀에 대한 남용이 심각했고 그 심각한 부작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 심지어 의사들도 남용을 일삼았던 시기였다.1931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도 급격하게 늘어난 아편 수납량이다. 1933년 수납량은 약 14000kg 까지 생산량이 계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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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후

일본은 패전 후에 막대한 양의 마약을 남기고 돌아갔는데 해방 후 1947년 에만 약 4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발생 했고 1957년 이 되서야 비로서 마약법이 최초로 통과 하게 된다 . 1965년대 마약 중독자가 갑자기 급증한다. 그 이유는 이들은 '메사돈'이라는 성분이 포함된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며 먹었는데 모르핀보다 더 강력한 마약성분이었다.  이윤의 눈이 먼 제약회사들이 당국에 허가를 받고 제조를 했고 중독자 수는 약 3만 명에 이르게 된다.

 

 

중국 국민당vs 공산당 

아편전쟁의 폐해는 1차 국공내전 (1927~1936)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국민당 정부에서는 많은 주요 간부들이 그때까지 아편을 피고 있었고 공산당은 돈이 없어 아편을 할 수 없었다.  국공내전때 마오쩌둥이 승리할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였다. 

 

[출처 국방TV 토크멘터리,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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