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은 독립을 했음에도 식민지를 지배했던 주체들이 지도자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상태였다. 이들은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에 들어왔던 백인들과 성격이 달랐다.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 등의 영국에 백인들은 이중 국적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자국으로 도망을 가곤 했다.
그러나 남아공에 있던 네덜란드의 백인들계 백인들은 아프리카를 자신의 땅으로 여기고 여기가 자신들의 고향이고 그들은 갈 곳이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들은 남아공 내에서 어떻게든 생존을 위한 모색을 했던 것이다.그런 와중에 1948년 백인들로 구성된 국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이 정권을 잡은 후 국제적 비난 속에서도 남아공은 이 인종차별 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실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1948~1994) 는 인종 차별 정책으로 "분리, 격리' 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이다. 남아공에 거주하는 소수의 백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인종차별 정책이다.
반투 자치법
가장 대표적인 적인 정책은 반투 자치법[홈랜드 법]으로 반투스탄이라 불리는 지역에 흑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흑인들을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에서 지정한 지역으로 흑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으로 흑인 이주 지역을 반투스탄이라 불렀고 반투스탄은 남아공 전체 영토의 13%에 불과한 지역이었다.
처음에 이 정책에 흑인들은 반투스탄으로 이주하면 흑인 원주민들의 독립 지역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말에 현혹되 이주를 했다. 그러나 반투스탄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국민으로서 받을 교육과 복지, 의료 등의 혜택이 상실이 되었고 반투스탄과의 경계 지역에 공장을 짓고 반투스탄의 흑인들을 외국인 노동자 취급하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도시 속 인종차별을 사례로 공공시설을 분리.
단순히 실생활의 분리를 넘어 제도적 분리까지 시행했다. 1950년 인종 등록법을 제정해 주민등록증에 인종을 기록하도록 했고 흑백 간 성관계 금지법 등을 제정했다.
아파르트 헤이트 저항 운동 ‘소웨토 항쟁’
이런 극단적인 차별에 분노한 흑인들은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시작한다. 그 중에 가장 뜨거웠던 ‘소웨토 항쟁’이 있다. 1976년 6월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학생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는데 처음에는 소웨토의 여러 마을에서 열린 평화 행진이었으나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를 진압한다. 그때 무려 700여 명이 사망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야만성을 전세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만델라 대통령 취임 후 철페
이 정책은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 하기 전까지 무려 46 년간 지속 되었다.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 정책의 철페를 위해 비폭력 저항과 무장투쟁까지 전개했으며 27년이라는 긴 시간의 감옥생활을 하고 1994년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 되면서 아파트르헤이트 인종차별 정책은 모두 폐지된다.
넬슨 만델라의 화해 정책 ‘진실화해위원회'
또한 넬슨 만델라의 위대한 업적 중 또 다른 하나는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이 정치적 범죄를 고백 할 경우 죄를 사면을 해주기 위해 설립한 기구이다. 남아공의 발전을 위해 흑백 간의 화해를 도모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국가폭력을 저질렀던 백인 경찰이 티비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 장면을 듣고 있던 피해자 가족 중 한 사람이 울고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가 옆에 있던 꽃병으로 백인 경찰이 머리를 가격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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