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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신덕왕후 강씨 조선의 첫번째 왕비의 무덤(정릉)에 무슨 일이?

by 365 ^^ 2021. 12. 19.

조선시대에는 27명의 왕이 있었고 추존된 왕까지 합하면 총 32명에 후궁을 제외하고 45명 정도의 왕비가 있었다. 조선의 첫번째 왕비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 둔 부인을 향처라 불렀다.  이성계의 향처는 신의왕후 한씨였고 수도 개성에 얻은 부인은 경처라고 했고 신덕왕후 강씨였다. 조선 개국하고 정비는 한명, 재혼하면 계비로 자리를 잡게 된다. 

 

신덕왕후 강씨

 

고려 이성계에게는 2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6남 2녀가 있었으나 조선 개국 10개월 전에 사망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는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는데 신덕왕후 강씨의 공헌이 컸다. 신덕왕후 강씨는 고비마다 뛰어난 판단력과 강력한 실행력으로 남편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로써 고려의 여인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신덕왕후 강씨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신덕왕후 강씨

 

신덕왕후 강씨 집안
조선 개국 전에 신의왕후는 사망함으로써 1392년 신덕왕후 강씨가 첫 번째 조선의 왕비로 책봉된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는 고려시대 권문세족 곡산 강씨 집안의 딸로 집안이 좋았다. 아버지와 삼촌이 고려 재상을 역임할 정도로 명망있는 집안으로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다. 

 

이성계의 정치적 조력자였던 신덕왕후 강씨
이성계의 정치적 조력자였던 신덕왕후 강씨

당시 이성계 집안은 존경받지 못하는 집안이었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향리로 있다가 쌍성총관부(고려 후기, 몽골이 고려의 땅이었던 화주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로 들어와 100년 동안 쌍성총관부의 관리를 지냈는데 이것은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의 이런 전력때문에 고려의 명문가들은 이성계 가문과 혼인을 기피하려 했었고 이성계는 당시 변방의 장수였기 때문에 정치적 지지기반이 약했는데 이 시기에 신덕왕후 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이성계 집안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나이 차이는 20살 이상 차이가 난다. 신덕왕후 강씨에게는 두 명의 아들 방번, 방식이 있었고 방번을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 공양왕의 동생 딸과 혼인시켰다. 또한 방간,방석을 명문가 자녀들과 혼인시켜 이성계의 정적은 줄이고 지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신덕왕후의 10세 아들 세자 책봉되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때 나이는 이미 58세였다. 그래서 빨리 후계자를 선정해야했고 신의왕후 사이에 6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신덕왕후의 아들이자 여덟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다.

 

이성계 가계도
이성계 가계도

대부분의 세자 책봉은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때 이 회의를 엿들은 후 태조 이성계에게 통곡을 하여 하소연하며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의 세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덕왕후의 첫째 아들 방번은 이미 고려 공양왕의 조카와 혼인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태종 실록 1405> 에 실린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기록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기록 <태종 실록 1405>

 

신덕왕후와 이방원

이 과정에서 가장 분노했던 사람이 이성계의 5번째 아들 이방원이었다. 이성계의 세자 책봉 단행 후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 이방원이었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원래 사이가 좋았다. 위화도 회군때 이방원은 방번과 방석을 직접 업고 대피했고 정몽주 격살로 이성계가 분노하자 이방원을 감쌌던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첫 왕위 책봉에서 강씨의 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후 이들의 관계는 틀어져버린다. 이성계가 왕이되고 한 달도 안돼 졸속으로 책봉이 이루어졌고 강씨의 이간질(정치력)로 이방원과 아버지 사이도 멀어지게 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

 

신덕왕후 사망
신덕왕후는 왕자의 난 2년전 1396년 8월 아들의 왕위 계승을 보지 못한 채 사망한다. 태조 이성계는 어린 왕비가 먼저 죽은 것을 슬퍼했고 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정성스레 왕비의 무덤을 조성했다. 정릉을 만들었다. 무덤을 덕수궁 근처에 조성한 이유는 태조의 거처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위치였기 때문에 무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당시 덕수궁&#44; 경복궁 위치
당시 덕수궁, 경복궁 위치

 

 

신덕왕후 무덤 정릉 이장 및 훼손

훗날 1408년 태조의 죽음이후 이방원의 복수가 시작된다. 신덕왕후 사후 2년뒤 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난(1398.8.26)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제거한 후 정종(조선 2대왕)의 뒤를 이어 조선 3대왕 태종으로 왕위에 오른 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성북구 정릉으로 옮겨 버린후 신덕왕후 무덤을 훼손하고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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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기록 신덕왕후 무덤 이전


또한 태종때 조성한 청계천(1406년)에 처음에는 흙을 사용해 축조했으나 튼튼한 돌을 이용해 보수할 것을 지시하면서 정릉의 석재로 돌다리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청계천 광통교 밑 신덕왕후 병풍석
청계천 광통교 밑에는 신덕왕후 무덤의 병풍석이 있다.
신덕왕후 무덤의 병풍석
신덕왕후 무덤의 병풍석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보면 다른 왕후의 능과 달리 무덤을 보호하는 병풍석이 없다.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보면 다른 왕후의 능과 달리 무덤을 보호하는 병풍석이 없다. 선정릉은 종종의 정릉(편안할 정), 신덕왕후의 정릉(곧을 정)을 사용한다.

 

조선의 18대 왕 현종 대에 이르러 신덕왕후의 복위와 훼손된 무덤을 복구하게 된다. 태종때 깍가버린 봉분을 찾을 수가 없었어 겨우겨우 힘들게 찾았다고 한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197회]

 


 

이성계 옆에는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다면 이방원 옆에는 원경왕후 민씨가 있었다.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 민씨 세종의 어머니가 태종에게 분노한 이유..

태조 이성계에게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원경왕후 민씨가 있었다. 정세를 판단하는 통찰력으로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지만 원경왕후는 이후의 결말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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