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인 귀순자 사건
(1984년 11월 23일)
장명기 상병 추모비 앞
JSA 판문점을 방문하면 그곳에 장명기 상병의 추모비가 있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남북 관계가 굉장히 좋았던 해였다.
그 해 서울, 경기 일대에 내린 폭우로 대홍수 났다. 퐁납동, 성내동, 망원동, 목동 등 지대가 낮은 곳은 물에 잠겼을 정도로 서울에서만 10만 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사망 약 189명, 실종 약 150명의 초대형 재해였다.
당시 북한이 수재 물자를 보내줬을 만큼 상당히 북한과의 관계가 좋았던 시절이였다. 6.25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물자 교류였다.
이런 남북 관계의 해빙기를 맞아 다음 해인 1985년 최초로 남북 고향 방문단(이산가족 상봉) 및 예술 공연단 교환방문이 이루어 졌다.
1985년 역사적 첫 이산가족 상봉었고
평양으로 간 50명의 방문단 중
35명이 가족을 만났고
서울에 온 50명의 방문단 중
30명이 가족을 만났다.
스물 두 살 밖에 안된 젊은 청년의 돌발 행동 이런 해빙기에 평양 주재 소련 특파원 '바실리 마투조크'는 당시 판문점을 방문 했을 때 돌발 행동을 한다. 바로 눈앞에 보이던 자유의 세계를 동경한다면서 갑자기 확 튀어나와 남측으로 달려 온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월남에 북한군은 그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기에 마투조크를 뒤쫓았고 남측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984년의 우호적인 남북 관계 속에서 한 소련 청년의 돌발 행동이 불러온 교전으로 장명기 일병(당시 일병)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전사한 날은 휴가에서 복귀한 다음 날이었다.
장명기 일병이 순국 후
훈장수여 및 상병으로 추서됐다.
이후 마투조크는 로마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0회,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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