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by 365 ^^ 2021. 3. 29.
반응형

[선을 넘는 녀석들 17회 ]

 

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을까 ?

 

국권침탈 후 10년 뒤 러시아에서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 지도자 레닌이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여 모든 민족에게 의사결정의 자유를 주겠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무렵으로 미국도 약소국가 독립 시켜주자! 는 닐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선포되면서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렇게 외교독립론의 일환으로 우리가 만세운동을 해서 세계에 이목을 끌기 위해 3.1 운동이 시작되고 그 결과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그 당시 대표적인 3개의 정부가 있었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서울 한성정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3개의 임시정부를 통합이 돼야 하는데 연해주는 일본과 접경 지역이라 제한이 많았고 국내는 일제 치하에서 활동이 어려웠다. 이에 반해 당시 상해는 국제도시로 비교적 활동이 쉬었다. 

 

우리는 프랑스 조계지에 자리 잡고 프랑스와 일본은 직접적인 관계없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유 , 평등, 박애 민주주의의 시작점이기에 우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프랑스 조계지를 선택해 1919. 4.11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조계지- 각 나라의 행정, 사법, 경찰권 등이 인정되는 곳. 일본의 간섭에 자유롭고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가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에 적합했다.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등이 임명됐다.


 

임시정부를 통합한 안창호

대한민국임시 정부가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쉽지 않은 통합의 길이었고 이런 와중에 통합에 큰 기여한 사람은 바로 안창호 선생님이다. 미주 지역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로 온 안창호는 지역 통합을 위해 연해주, 한성,상해 등 각 지역의 요구를 중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에 기여한다. 모든 권력, 기득권을 다 내려놓았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

안창호 선생 신년사.
“지금 우리 나라에 황제가 있습니까? 황제가 있습니다. 그 황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옛날에는 황제가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가 황제입니다. 대통령, 국무총리 모두 우리의 노복입니다. 우리 황제들은 이제부터 저기 있는 노복들, 정치인을 어떻게 인도할까를 잘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복들은 어떻게 하면 황제인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잘 모실지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복들은 절대 한 사람의 명령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모였을 때 국민의 주권이 완성되는 것이니 우리 모두의 명령을 따라야지 특정인 한 사람의 권력에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창호 선생을 찾아온 김구

이 때 김구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와서 안창호를 찾아간다. 이에 안창호 선생은 김구를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명하고 일본 첩자를 잡아내고 독립 운동가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겼다.

 

김구 선생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던 신규식

신규식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이다. 신규식은 언어천재로 세 살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세계사의 흐름을 보는 안목도 뛰어나 미리 중국 상해에 건너온다. 그때가 신해년에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 민국을 세운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났던 해이다.

 

신규식 선생

신규식 선생은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과 교류하며 입지를 다진다. 그 후 신규식은 신채호,박은식 등과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독립운동에 큰 기폭제가 되고 대표적으로 일본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을 촉발시킨다. 이에 자극받은 것이 바로 3.1 운동이고 삼일 운동의 여파로 만들어진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예관 신규식 선생님은 나라를 잃고 분하여 자결하려고 음독을 했으나 실패하고 그 휴유증으로 눈이 불편해졌다고 한다.

 

 신규식 선생의 호 예관으로 지은 이유는 곁눈질할 예. 볼 관

 

마지막에는 식사와 약을 끊고 입까지 다물어버린 불식, 불약, 부언, 하시다가 마지막 순간 유일하게 남긴 말씀이 정부.. 정부... 마지막 순간까지 임시정부를 걱정하다 43세로 별이 된 잊지 말아야 할 영웅이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는 1943년 개항했고 상업과 금융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도시로 당시 상하이에는 700여명의 한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정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김구 선생이 상해 도착하던 그달 1919년 4월 마침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임시정부 3단계

임시정부 3단계 

 

1. 상해 시절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제일 힘든 시기))

2. 8년간 이동시절

3. 충칭에서 자리 잡고 김구 주석으로 독립의 꽃 피운 시절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1919년 이후 해마다 신년이 되면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신년회를 가졌고 이렇게 단체 사진을 매년 남겼다. 

(좌)임시정부 신년축하식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창설 이듬해) /(우) 상해 '대동여사' 여관의 옥상

1926- 1932년까지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던 해까지 존재하던 마지막 청사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곳이다. 초기 임시정부는 세 들어서 살았고 시장에서 주운 채소로 국을 끓일 정도로 너무 열악했던 상황이었다. 임시정부가 가장 힘들던 당시 상황을 알수 있는 자리이다.

 

평범한 가정집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임시정부 입구
임시정부 회의실
입구의 김구 동상

 

역대 대통령 국무령 사진들
당시의 부엌을 재현해 놓음
가파르고 협소한 계단
2층 김구 선생의 집무실
김구 선생 집무실 2
3층 침실 

임시정부는 시작부터 이름이 대한 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었다. 대한제국 이후 나라의 주인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표방해 대한민국을 설립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고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 안창호 선생의 정신이 녹아져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금 대한민국의 시초이다. 

 

최초 한법: 민주 공화제. 지금 헌법과도 비슷한 내용.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