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5회 4]
오늘의 탐사지: 제주도
주제: 삼별초 항쟁 역사
출연자: 설민석
삼별초의 의미
삼별초는 무신정권 당시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든 특수 사병조직이었다. 삼별군이 아니라 초라고 불리는 이유는 뽑을 초 자를 사용 , 정예의 특수부대를 이르는 말이다.
삼별초의 구성
야별초는 야간 순찰대를 뜻함
삼별초 항쟁 이유
30여 년간 몽골과의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곪아있던 상황에 제 24대왕 원종은 왕으로 즉위 후 몽골과 사대 관계를 맺는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몽골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다.
막강한 몽골에 맞서 약 28년 동안 항전한 고려인데 몽골의 실세 쿠빌라이의 손을 잡은 태자 원종은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 몽골의 속국을 자처했고 몽골과 화의를 맺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선언한다.
삼별초 리더 배중손
(강화도)
삼별초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강한 세력과 권력을 확보되었고 배중손을 중심으로 몽골에 항복한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기 시작한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 정부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고 새로운 왕을 옹립
왕온이라는 고려 왕족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 설립을 추진한다.
삼별초 거점 이동 경로
강화도->진도
진도를 선택한 이유 본토와 가까우면서 공격과 방어에 유리한 위치라 판단했고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경상도, 전라도에서 거둔 조운의 수송선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해 군수품 확보에도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조운선을 탈취하여 고려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진도의 항몽 전투
삼별초는 일주일만에 진도로 이동을 시작하는데 고려와 몽골의 여몽연합군이 뒤를 쫓고 있었고 이들은 해남 인근에서 전투를 벌인다.
진도를 거점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여 전라도를 석권 후
진도->제주도
원종은 삼별초의 제주 상륙을 대비해 먼저 고려 관군을 진도가 아닌 제주도로 보내서 삼별초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를 장악하고 제주도로 들어온 고려 관군은 환해장성을 쌓는다.
제주
환해장성과 별도연대
제주 환해장성
별도 연대
별도 연대란 제주 화북동의 옛 지명이 '별도' -바닷길 벼랑이란 뜻 '연대' 는 봉수대 처럼 횃불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수단을 가리킨다.
고려 말에 짓기 시작해서 조선 시대 때 주로 활용했던 별도연대
별도연대
그러나 삼별초는 이미 알고 있었고 최후 거점인 제주도를 뺏길 수 없었기에 고려 관군이 장악한 제주도를 삼별초가 공략을 시도한다.
원종의 회유
이에 원종은 배중손을 회유하고 배중손은 2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세력을 확장하고 방심하고 있던 제주에 있던 삼별초에게 전해진 소식은 여몽연합군이 진도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진도 탈환이 시급했던 여몽연합군은 진도 총공격을 한다.
진도 함락 (벽파진 전투)
(제주도->진도)
여몽 연합군이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으로 올 것이라 생각한 삼별초는 모든 병력을 진도 해안가에 위치한 나루터 벽파진으로 집결시킨다.
뒷쪽에 용장성도 공격해온 여몽연합군에 밀리게 되면 삼별초가 패배하게 된다.
배중손의 죽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세운 왕, 왕온의 안위였다. 그러나 피난을 가던 왕온은 몽골 부대의 추격을 받아 참살당한다.
배중손의 뒤를 이은
김통정 장군
(진도->제주도)
살아남은 군사들은 김통정 장군을 따라 바다 건너 제주도로 들어오게 되고 제일 먼저 항파두리성을 쌓아 거점 복원한다. 그 와중에 제주도민은 심각한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받았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삼별초가 최후까지 대몽항쟁을 벌인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
사적 제396호
항파두리-> 항아리 항 , 파두리-> '둘레' 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 '바두리' 에서 온 뜻으로 항아리 모양의 요새라는 뜻의 항파두리 토성 이다.
항몽순의비
항파두성 터
각종 방어시설과 궁궐, 관아까지 갖추었던 항파두리 토성으로 이곳은 삼별초가 항몽했던 최후의 거점지이다.
삼별초의 4개도 점령
원종 입장에서는 머나먼 제주까지 밀려나게 되었으니 삼별초와의 전투를 정리한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은 어느날 삼별초가 전라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육지에 상륙한 삼별초는 전라도를 점령후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치고 올라온 후 경기도까지 점령 몽골의 주둔지가 경상도까지 공격한 삼별초는 결국 4개의 도를 삼별초가 점령하게 된다.
원종의 회유
이 소식에 놀란 원종은 삼별초 소탕을 위해 원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진압하기 전에 다시 한번 초유사(화친 사절)를 제주도로 보내 회유를 시도한다.
그러나 초유사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결국 삼별초에 붙잡혀 추자도에 구류당한다.
초유사가 온 이유를 묻자 화친의 메세지를 알리지만
김통정 장군 왈
그리고 가장 늙고 힘없는 노 젓는 선원을 제외하고 초유사 모두를 죽인 후 그 사람을 통해 답신을 보낸다. 그때 금훈이라는 초유사 관리가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을 고하고 군사력으로 제압해야 됨을 권한다.
그러나 원종은 다시 한번 김통정의 가족을 회유 사신으로 보내지만 조카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참수한 후 화친할 생각이 없음을 알린다.
삼별초의 최후
원종은 토벌만 있을 뿐 더 이상의 회유는 없다고 판단, 병사 6000명, 뱃사공만 3000명 그리고 몽골군이 연합하러 내려오고 해안가에서 수백 척의 전함을 건조하고 있는 사이 원종에게 소식이 들린다.
삼별초가 전라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에 대비해 방어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전라도를 공격해버린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고 생각하고 전라도 공격하고 6일 뒤에 경상도까지 침공한 삼별초였다.
성동격서 전략을 쓴것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공격을 감행한 삼별초로 인해 분노한 원종과 몽골은 전함 160척에 1만 2천여 명을 이끌고 출전한다. 전술, 전략이 필요없는 압도적인 병력 차에도 제주 앞바다에서 끝까지 항전한다.
당시의 처참했던 풍경을 상상케 하는 대목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으로 후퇴하며 끝까지 싸웠지만
여몽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삼별초는 패배한다.
삼별초에 대한 인식
삼별초는 항몽의 아이콘이자 자주의식의 상징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미화된 감이 있다. 그들은 단순히 애국심만으로 시작한 항몽은 아니였고 기득권도 포기 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정보가 몽고로 넘어간다고 하니 안위를 위해 목숨도 지키기 위해 항몽을 시작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했다면 타협을 하거나 항복했을 텐데 한라산까지 오르며 끝까지 항전하고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했던 그들의 기개와 절개, 용기와 기상만큼은 진짜 군인이었다. 이렇듯 삼별초를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4부 끝
▽ 이전내용 보기
☞고려 몽골 전쟁 과정 및 김윤후 장군의 활약 /강화 홍릉 3부
☞무신정변의 원인과 경과(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 1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