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백년 전쟁 (벌거벗은 세계사 42회 )

by 365 ^^ 2022. 4. 18.


백년 전쟁 시기
100년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1337년~ 1453년까지 113년간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100년 전쟁의 서막은 1328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다. 당시 프랑스 카페 왕조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1328년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를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다. 이때 새로운 프랑스 왕 후보로 거론된 두 사람이 있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였다.

 

* 백년전쟁 후 영국과 프랑스의 인식 속에 국가의 개념이 생겼다. 

 

백년 전쟁 원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 
그리고 이때부터 중세버전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다. 당시 샤를 4세의 형제들은 모두 사망하고 여동생 이사벨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고 에드워드 3세가 태어난다. 

 

또 다른 프랑스 왕 후보 필리프 6세가 있었는데 아버지 필리프 4세에게는 동생 발루아 백작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필리프 6세였다. 왕의 조카와 왕의 사촌의 대결이었다.

 

 

왕위에 오른 것은 필리프 6세였다. 이유는 프랑스 귀족들이 반대로 에드워드 3세는 왕위를 오를수 없었다.  왕위 다툼에서 밀린 에드워드 3세는 분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의 주종 관계는 어떻게 형성 되었나? 

당시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였다. 잉글랜드에서 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중세 왕과 기사의 관계
중세사회는 왕과 기사사이에 특별한 주종관계로 이루어졌었다. 충성과 봉토를 주고 받은 왕과 기사는 쌍무적 계약 관계가 맺어지면서 그 땅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후손
백년전쟁 300년 전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가신이었던 노르망디 공작이 (윌리엄 1세) 잉글랜드를 쳐들어 갔고,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 왕을 죽이고 노르만 왕조를 창건했다. 이를 노르만 정복이라고 한다. (1066~1071) 잉글랜드 왕실 은 노르망디의 후손이 된다.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왕의 신하라는 두 개의 신분을 받게 된다. 이후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프랑스의 영토를 확보한다. 반대로 프랑스 왕들은 그 영토를 몰수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 세에 왕위 계승권 다툼이 일어날 때 즈음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기옌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 이권 다툼이 끝난 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가서 필립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기옌 지방 프랑스 영지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절차였다. 한 국가의 왕이지만 결코 대등할 수 없었던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의 관계였다. 

 

 

백년 전쟁의 시작점

전쟁의 도화선 플랑드로

필리프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부터 이 두 사람은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두 왕의 신경전이 벌어진 곳이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이곳은 유럽 최대의 모직물 생산지로 프랑스 경제적 요충지 중 한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동시에 잉글랜드에도 중요한 도시로 모직물을 만드는 주원료가 잉글랜드의 양모가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플랑드르의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탐냈던 프랑스였다.  

 


사실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전부터 프랑스 왕가는 플랑드르의 막대한 이익을 탐내고 빼았으려고 했기때문에 프랑스 왕권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그리고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플랑드르에서 또 다시 봉기가 일어난다. 이 일을 계기로 필리프 6세는 플랑드르의 봉기를 진압 후 플랑드르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는 플랑드르의 잉글랜드 상인을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의 양모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 이에 프랑스 플리프 6세는 잉글랜드 왕의 기옌 땅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기옌 지역의 보르도는 유럽 저녁에 와인을 수출하며 프랑스 경제에 큰 기여를 한 땅이다.  

 

프랑스 전쟁 선포

기옌 몰수 소식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플리프 6세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렇게 1337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백년 전쟁의 시작이다. 

초기 상황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국력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잉글랜드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프랑스 인구가 잉글랜드 인구의 4배정도되었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가 발달했던 프랑스는 기사의 수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1339년 10월 약 1만 2천명의 군대로 에드워드 3세는 직접 프랑스를 공격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수많은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약탈했고 프랑스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 열세했기 때문에 전면전 대신 소규모의 병력으로 수행할수 있던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기사도 원칙 

갑옷 무게만 20~25KG이었고 투구 무게2~4KG으로 무장
여성을 대하는 매너도 기사도에서부터 유래돼었다.

 

크레시 전투 (1346년)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하게 되고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북쪽의 항구도시 칼레를 목표로 삼았다. 칼레는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잇는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도시로 칼레를 교두보로 삼으려했던 잉글랜드였다.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잉글랜드에 저항했으나 결국 잉글랜드에 넘어간다.

 


그러나 칼레를 점령한 다음해 부터 전 유럽을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전쟁은 7년간 멈추게 된다.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한 무시무시한 흑사병이었다.

 

흑태자 vs 장 2세
이렇게 흑사병이 잠잠해질 무렵 1355년 기회를 노리던 잉글랜드 군은 다시 프랑스를 공격한다. 이번에 흑태자라 불리던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 전쟁을 이끌었고 프랑스도 플리프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장 2세가 맞서게 된다.

 


푸아티에 전투
선제 공격을 시작한 흑태자는 보르도를 시작으로 프랑스 남부지역을 시작으로 수많은 마을을 약탈해 나갔다. 이에 1356년 잉글랜드의 장 2세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푸아티에에서 맞붙게 된다. 
 
잉글랜드 군대는 약 7천명, 프랑스군은 약 1만 4천명으로 약 2배였다. 그러나 아버지 필리프 6세도 대규모의 군대로 잉글랜드군에게 완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술에 변화를 준다. 언덕 위에 잉글랜드군은 자리를 잡았고 프랑스군에 무거운 갑옷과 늪에빠져 지치고 만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또 다시 완패한다. 

중세시대에 장갑을 건낸다는 것은 자진해서 포로가 되겠다고 밝히는 것이다. 장 2세의 선택으로 왕자와 고위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포로가 된다. 

브레티니 조약(1360)

이때 잉글랜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약을 맺게 되고 그 조약이 브레티니 조약이다. 

 

브레티니 조약 내용


이 조약으로 아키텐 지역을 차지함과 동시에 봉건적 의무가 해제되었다.  프랑스 신하에서 벗어나 아키텐 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이 조약으로 잉글랜드 영토는 4배 정도 넓어졌다.

 

 

또한 장 2세의 몸값은 현재 가치로 약 6천억~7천억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한 번에 이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다. 300만 크라운은  무려 2년치 예산에 달하는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장 2세는 프랑스에 있던 두 아들을 볼모로 맡기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거액을 마련하게 위해 애를 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장 2세는 포로생활을 하기로 결정한다. 

샤를 5세, 6세
장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샤를 5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에 빼앗겼던 연소를 다시 되찾는다. 그러나 프랑스의 행운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병약했던 샤를 5세는 일찍 죽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미치광이 왕이었다. 일찍이 왕이 된 샤를 6세는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가 있었다.  심지어 샤를 6세는 자신의 몸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떠들면서 자신의 몸에 손도 데지 못하게 했고 5개월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는 등 기행을 보여줬다.

부르고뉴 파 잉글랜드와 동맹
이에 미치광이 왕의 숙부 부르고뉴 공작이 권력을 잡았으나 어느날 공작은 암살을 당한다. 그 암살의 배후로 프랑스왕실의 음모로 생각했고 이들은 결국 이들은 잉글랜드와 손을 잡게 된다.  

 



1415년 아쟁쿠르전투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에는 아주 강력한 왕 헨리 5세가 즉위한다. 헨리 5세는 아직까지 받지못한 장2세의 몸값을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 아쟁쿠르를 침공해 엄청난 승리를 거둔다. 

트루아 조약
그 여세를 몰아 4년 뒤에는 프랑스 수도 파리까지 점령한다. 이때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맺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프랑스 샤를 6세 딸과 자신이 결혼을 해서 왕자가 태어나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공동왕이 된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샤를 6세 아들 샤를 7세는 왕위 계승권 박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헨리 5세는 결혼을 하게 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헨리 6세 왕자가 태어난다. 

 


헨리 6세 VS 샤를 7세
이대로 헨리 6세가 왕이 되면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프랑스에 한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잔 다르크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42-2] 계속

잔 다르크 이야기(100년 전쟁 속 성녀에서 마녀로 화형 당한 이유)

 

잔 다르크 이야기(100년 전쟁 속 성녀에서 마녀로 화형 당한 이유)

이전 내용 [42-1] 잔다르크 이야기 잔다르크가 활동했던 무대는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다. 오를레앙은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맞닿아 있는 접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오를레앙을 장악하려는 잉

jangane.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