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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만해 한용운 생가터 (선을넘는녀석들리턴즈 59회)

by 짱신나^^ 202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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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9회 중]


오늘의 탐사지: 충청남도 홍성

주제: 한용운 
출연자: 설민석 




한용운 



한용운 생가지 


이곳은 만해 한용운의 얼이 그대로 살아숨쉬는 곳으로 한용운이 살았던 생가와 그를 기리는 사당도 있는 곳이다.  


만해 한용운의 이미지는 <님의 침묵>만 보면 차분함, 온화함,부드러움등 서정적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사실 실제 성격은 정반대였다. 우리가 알던 시와는 사뭇 다른 만해 한용운의 성격 


만해 한용운은 어떻게 독립투사가 되었나?

10대 시절 한용운은 홍성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일어났던 제 1차 홍주의진을 보게 된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던 의병들의 항쟁을 보게 되고 18세쯤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인생에 회의가 들게 되고 그 길로 속리산을 찾아가 입산하게 된다.  다시 한용운은 속리산에서 월정사로 이동하지만 더 깊은 대찰을 찾아 백담사로 가서 출가를 결심한다. 


그곳에서 무소유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 한용운의 인생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데 청나라의 세계지리서<영환지략>이라는 책을 한 스님에게 건내받는다.


서양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한 책으로 조선 이외에 많은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된 만해 한용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가 최린을 만난다. 

훗날 최린은 민족 대표 33인에서 친일파로 돌아선다. 

1909년 10월 안중군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처단, 1910년에 경술국치 나라가 망한다. 그리고 2년뒤 독립운동하는 독립운동가를 만나기 위해 만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회영 이시영 6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수백억 재산을 바쳐 독립군 양성학교 신흥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는다. 



그후 돌아오는 길에 만주의 젊은이들이 한용운을 친일파로 오해해서 독립군 청년의 총에 맞아 총알이 뼛속까지 박혔다. 마취를 하고 총알을 빼야하는데 마취를 하지 않고 총알을 제거하는 동안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참았고 그런 한용운을 보고 의사는 놀라서 수술비도 받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그 일로 깨달음을 얻은 한용운은 립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표출할 것을 계획하고 일본에서 만났던 최린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사람을 모으기 시작하고 그렇게 민족대표 33인이 만들어지고 한용운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본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쓰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이미 최남선에게 맡긴 상태였다. 최남선이 글 잘 쓰는건 인정하지만 최남선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작성하고 이름은 넣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훗날 조국을 등지고 민족을 배반했던 최남선이다. 



슬쩍 발 빼는 최남선의 태도에 화가 난 만해 한용운은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3장 부분을 쓴것으로 추정된다. 

공약 3장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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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1운동은 일어나고 민족 대표 전원은 일제의 경찰에 연행이 되고 끌려가는 만해 한용운은 백성들의 만세소리에 큰 감동을 받아 그 순간의 기억을 글로 남겼다. 

한용운 <평생 못 잊을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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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감옥에 수감된 만해 한용운 

시간이 지나면서 형벌 앞에 나약해지는 민족대표들이 늘어났고 일부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조서를 꾸미는데 나가서 독립운동을 계속 할 것이냐는 물음에  강한 독립의지를 피력한다. 

일본은 반드시 패망하고 말것이며 우리 조선은 반드시 독립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옥살이 중 쓴 만해 한용운의 명문장은 일제강점기 2대 명문으로 뽑힌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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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재판 중 심문에 대한 답변이다. 일본인 검사와 말 섞기 싫다는 이유로 글을 쓴 만해 한용운이다. 


이글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검사에게 담변 제출 후 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간수에게 부탁한 종이에 글을 옮겨 적어 제자가 면회왔을 때 글을 숨겨 밖으로 보내고 전달 받은 것을 항일승려에게 다시 전달된 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에 게재되었다. 


만해 한용운 고개가 약간 삐뚤어진 모습은 총상으로 박힌 총알을 긁어낸 후유증이다. 척추에 총상을 입고 뼈를 깍는 수술 이후 머리를 흔드는 후유증이 생긴 한용운 


그 후 2년 뒤에 출소한 한용운은 한용운을 마중나온 동료들 보자 


마중 나온 동료들은 한용운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었고 옥고 치르고 나온 사람 마중나올 줄만 알고 자신이 옥살이하고 다른 사람들 마중 나오게 할 줄은 모른다는 뜻이었고 그 말과 함께 그 사람들에게 침을 뱉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생신은 경술국치일로 본인의 생일에도 기뻐하지 못한 만해 한용운이었다. 

만해의 뜻은?


부처의 덕이 바다와 같다는 뜻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개념이 들어오게 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립하는 양상이 된다. 이념보다 민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이 펼쳐진다.  민족유일당운동의 연장선으로 신간회를 결성되고 한용운은 항일단체 신간회의 일원으로 민족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또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시 88편을 모아 <님의 침묵>을 발행한다. 

글뿐만 아니라 언변도 뛰어났던 한용운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을 했다. 


'철창철학' 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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