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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마틴 루터 킹 이야기 : 흑인 인권 운동가 118-3

by 365 ^^ 202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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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그는 누구인가? 

마틴 루터 킹은 몽고메리 지역 흑인 교회의 목사였다. 흑인 공동체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엘리트 중의 한 명이었고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인으로서 목사의 자격으로 백인정치인들과도 교류할 수 있던 인물이었다. 

 

 

1955년 [자세한 내용 보기]몽고메리 버스 사건으로 마틴 루터 킹은 버스 보이콧을 이끈다. 흑인들은 걸어서 이동하거나 택시를 이용하며 버스 보이콧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회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에 버스 회사를 더 압박하기 위해 또 다른 조치를 취한다. 

 

▶ [자세한 내용 보기] 몽고메리 버스 사건

 

몽고메리 개선 협회를 통해 약 320대 정도의 차량을 카풀 서비스로 활용했다. 매일 3만여 명의 흑인들이 버스 보이콧에 참여했고 버스를 이용하는 흑인 승객이 75%이상 감소하였다. 이어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카풀 차량을 망가뜨려 놓거나 카풀 서비스를 이용하는 흑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심지어 백인경찰도 보이콧 당해에 동참했다. 경찰 카풀 정거장에 대기하고 있다 흑인들이 탑승하며 각종 범칙금의 적용해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이런 상황에도 폭력은 절대 안된다고 호소했다. 

 

 

1956년 2월 버스 보이콧을 시작한지 3개월 후 마틴 루터 킹과 보이콧에 참여한 89명이 주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마틴 루터킹은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이것을 계기로 흑인 차별 철폐의 연설을 호소하며 전 세계적으로 지원을 받게 된다. 약 1년간 백인 우월주의에 맞선 끝에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 분리법 위반을 판결한다.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이후 그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다. 흑인 민권 운동을 벌이는 동안 단 한 번도 폭력이 없었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간디, 성경 속 모세라고 불리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시위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버스 보이콧 성공 후 백인 우월주의자의 표적이 된다. 마틴 루터 킹의 집이 폭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백인이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그의 집은 무너져 버렸다. 그 안에는 10주 된 아이가 있었다. 

 

 

이를 본 흑인들은 분노에 휩싸여 마틴 루터 킹에게 다른 메세지를 요구했으나 그는 백인이 무슨 짓을 하건 비폭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전한다. 이런 일을 겪고도 그는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았다. 비폭력 시위로 체포되고 수감생활도 했지만 그는 비폭력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 에서 워싱턴 행진 평화 시위에서 마틴 루터 킹이 한 연설을 한다.  흑인.백인 다 합쳐서 약 25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인종, 출신과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게 대우 받아야 한다는 연설을 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간에 평화적인 공존을 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했다. 

 

마틴 루터 킹 연설 I have a dream

https://youtu.be/qKJsbDJnfJU?si=acb8bCKnz1mLM__R 

 

그날 마틴 루터킹의 연설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에 힘입어 그의 흑인 민권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1964년 12월 10일 35살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그러나 미국은 수정 헌법 제 15조에 따라 참정권을 흑인들이 받았으나 흑인들이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의 정당한 투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또 다른 행진을 준비한다. 

 

 

셀마 대행진에서 6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를 했는데 경찰들이 행진을 위협하면서 폭력진압을 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굴복하지 않고 1차, 2차, 3차 행진을 이어 나간다. 3차 행진에서는 처음의 3배 2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에 흑인 투표권에 대해 수정헌법 제15조 내용을 연방법으로 재차 확인한 미국 연방의회와 린든 B. 대통령이었다. 

 

마틴 루터 킹의 죽음

이후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의 인권,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1960년대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노력을 했다. 1966년 공포에 반대하는 행진, 1968년 흑인 청소 노동자를 위한 연설등을 했다. 그러다 1968년 4월 4일 흑인 노동자를 위한 연설로 방문한 테네시주 멤피스의 모텔 2층 발코니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때 마틴 루터 킹의 나이는 39살이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연방정부는 마틴 루터 킹이 태어난 1월 15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과 가는 길이 달랐던 인물이 있다. 마틴 루터킹의 비폭력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 맬컴 엑스였다. 

 

말콤 엑스 Malcolm X :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엑스 Malcolm X : 흑인 인권 운동가 118-4

말콤 엑스는 마틴 루터 킹과 더불어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그는 흑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백인에게 폭력 시위를 해도 된다는 주의였다. 같은 흑인이었지만 마틴 루터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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