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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라스푸틴 ! 니콜라이 2세 러시아 마지막 황제 제국의 충격적 결말 이끌다 !! 50

by 365 ^^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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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마지막 황조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황조의 마지막 황제로 1894~1917년까지  23년간 재위한 황제이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14번째 황제로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신장염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1894년 갑자기 급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황조의 마지막 황제로 1894~1917년 23년간 재위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시야' 를 주인공으로 한 1997년 작 애니메이션도 있다.

 

 

니콜라이 2세의 화려한 생활 

니콜라이 2세는 황제의 역할이나 국정 운영에 전혀 관심이 없던 인물로 그는 문제없이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리바디야 궁전은 총  116개 방으로 모두 화려한 모습이고 건축비용으로 400만 금루블= 현재가치로 약 3000억 원을 사용, 러시아뿐만아니라 해외에도 여러 건축물을 지었고 계절마다 황실 전용 열차를 타고 유럽 곳곳의 궁전에서 생활을 했다. 

 

리바디야 궁전 / 프랑스에 지은 성 니콜라 대성당은 화려하기로 유명.

 

그는 러시아 활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차를 보유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동차 두 대 구입 비용만 10만 루블로 현재 가치로 약 80억원이었다. 

 

 

 


황제 부부는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가족이었는데 5년뒤 이 가족은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한밤중 지하실에서 일가족은 몰살당했다. 황제 일가의 몰살과 거대한 러시아 제국의 종말은 정말 충격이었고  러시아 제국의 몰락은 저주와 같은 악재와 최악의 선택들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중심의 한 인물이 바로 러시아 최악의 괴승 라스푸틴이 깊숙이 개입되 있다.

 



라스푸틴은 누구? 

라스푸틴은 밤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진 성적 스캔들이 많았던 인물로 자신이 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몰락을 예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요즘으로 치면 사이비 교주 같은 느낌이다.  

 

라스푸틴은 괴상한 수도승이었다.(괴승)

 

라스푸틴의 집안 배경은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글도 깨치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술과 여자에 빠졌던 한낱 방탕한 주정뱅이였다. 라스푸틴의 코가 약간 삐뚤어졌는데 술 마시고 싸워서 생긴 흔적인 것이다. 그 만큼 방탕함 그 자체였다. 

 

수도승 라스푸틴
18세 때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녔던 라스푸틴이다.  마을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던 라스푸틴은 어느날 말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마을에서 쫓겨난 라스푸틴은 이를 계기로 시베리아를 떠나 순례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변했다.  방탕한 삶을 회개하고 성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라스푸틴은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 확신하고 직접 신과 교감을 원했던 라스푸틴은 러시아 정교가 아닌 흘리스티에 관심을 갔게 되었다.  

 

흘리스트=채찍 이라는 뜻으로 17~20세기 초 러시아의 지하 이단 종파였다.  흘리스티는 죄를 지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괴변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종파였다.

 

흘리스티의 독특한 예배

예배장소는 헛간이나 목욕탕이고 이곳에서 신도들은 채찍으로 스스로를 때리고 다른 사람을 때리기도 하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신도들이었다. 또한 옷을 벗어던지고 성적인 관계를 했다는 설도 있다.  흘리스티는 모든 성적인 관계는 죄악으로 규정했고 죄를 저지른 다음 열렬히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라스부틴은 이런 흘리스티 교리에 빠져 공식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라스푸틴의 명성 

그는 이단 종파에 관심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았다' 선언했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영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카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찾아가서 수도승이 된다.  예언과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고 명성을 얻었는데 카잔의 대주교의 눈에 띄게 되고 라스푸틴을 위해 수도행 추천서를 작성해 준다. 

 

 



이런 추천을 가지고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다. 소문과 추천장으로 라스푸틴에게 쏟아진 귀부인들의 관심을 얻게 되고 한 귀부인이 병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하스푸틴이 기도하자 그녀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라스푸틴에 열광하는 귀부인들이 늘어났다. 이런 소문으로 귀족뿐 아니라 황족에게도 영향력을 넓혀 나가며 황실에 접근한다. 

 

 

니콜라이 2세

당시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고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6살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처 제왕교육을 미처 마치지 못했다. 황태손과 황태자였지만 황제가 될 자신이 없었던 니콜라이 2세였고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이 됐던 사람이 아내 알렉산드라 황비였다.  유럽 왕가는 정략결혼이 다반사였지만 연애결혼을 한 황제와 황비였다. 

 

26세에 황제가 된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의 여린 심성은 국정에도 양향을 끼쳤고 국정문제에도 주변에 쉽게 휘둘려 황제의 치세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자유주의 사상이 러시아 제국가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제정치 대신 민주주의로 가는 거대한 흐름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황조 가계도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황권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황제의 할아버지 2세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개혁을 주도한 군주였으나 혁명가들의 폭탄 테러로 암살을 당한 알렉산드로 2세의 모습을 본 아버지 알렉산드로 3세는 이런 혁명가들을 강력하게 탄압했고 강력한 전제군주 체재를 갖춰갔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니콜라이 2세도 강력한 전제주의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로마노프 황조 가계도

 

 

러시아를 위험에 빠뜨린 세가지 사건

 

사회주의 확산
이 시기의 또 다른 변화는 사회주의의 확산으로 전제 정치의 폐지와 평등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고 그 중에는 20대의 젊은 사상가 레닌도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강한 탄압으로 레닌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혁명 활동 중 위험인물로 체포되어 1896년부터 1년여간 감옥 생활을 했고 이후 시베리아로 추방됐어 서유럽으로 망명을 한다. 그리고 러시아 밖에서 끊임없이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한 볼셰비키 당을 이끌었고 혁명사상을 널리 러시아에 퍼뜨린다. 

 

러일 전쟁

이런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니콜라이 2세는 일본과의 전쟁을 돌입한다. 이것이 바로 러일 전쟁이다.  러시아는 당시 1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 육군 보유국으로 거대함 함대까지 보유했기에 빠르게 승기를 잡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서 러시아는 일본군에게 연패를 당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사건

프랑스 혁명, 러일 전쟁 국내외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905년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바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당시 정부는 2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더 많은 사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전제 정치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혁명의 물결이 러시아를 덮치게된다.  사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이고  모스크바에서도 총파업이 진행되었고 궁지에 몰린 니콜라이 2세는 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혁명가를 색출해서 모조리 처형했고 이 시기에 러시아 전역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라스푸틴의 등장

니콜라이 2세는 이 시기에 나라를 돌볼 정신이 없었다. 4명의 딸을 낳은 후 결혼 10년 만에 얻은 아들이 혈우병이었고 이를 비밀에 붙인 황제 부부였다.

 

알렉세이 황태자

 

그러던 어느날  황태자 알렉세이가 넘어져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게 되니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고 이때 치유력을 가진 성자로 이름을 알리던 라스푸틴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황제 부부를 만나게 되고 라스푸틴이 다녀가면 황태자의 출혈이 중단되고 호전되었고 황태자가 아플때마다 라스푸틴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그후 공주들과 황제부부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라스푸틴은 수시로 궁에 드나들게 되고 황제가족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 서류들을 직접부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청탁은 수용됐고 그 대가로 부를 쌓게 된 라스푸틴이다. 라스푸틴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수많은 여성과 문란한 관계를 맺었다.  황태자의 보모가 강간을 당했다고 하자 황비는 오히려 보모를 해고해 버렸다. 이렇게 되니 교회와 언론은 라스푸틴을 맹렬히 비난했다.  

 

황실의 권위 추락 사건
그러나 황제는 황실의 비밀을 쥐고 있기때문에 라스푸틴의 행동을 방관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 황실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고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황비가 라스푸틴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황실 권위는 떨어지게 된다.

 

 

이 편지로 러시아 국민들은 황비와 라스푸틴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러시아 황실이 라스푸틴에게 휘들린지 몇년이 지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니콜라이 2세의 최악의 결정
1914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과 함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느낀 니콜라이 2세는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심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게 되면서 난국을 타개할 방법으로 최악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총사령관을 해임하고 직접 동부전선으로 출정을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의 배후엔 라스푸틴이 있었다. 

 

 

 라스푸틴은 황제가 전장에 있어야 승리한다는 예언을 했고 이것은 수도를 떠나 전장에 황제가 있고 러시에 제국의 중요한 국정을 황비가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운명은 라스푸틴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라스푸틴 황실 장악
이후 황비는 라스푸틴의 말에 따라 유능한 대신들을 모두 교체하고 심기를 거스르는 자들은 거침없이 끌어내린 라스푸틴이었다. 

 

 

황제는 전쟁에 관한 상황은 국가 기밀이기에 절대 라스푸틴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황비는 이를 어기고 황제의 군사 관련 결정들을 모두 라스푸틴에게 전달했었다.  결정적으로 전쟁을 지휘할 경험과 전력이 없는 황제는 긴박한  전쟁터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자연스레 전쟁에 개입했던 황비와 라스푸틴이었다. 

 

라스푸틴 사망
이렇게 이 시 기에 황실에 대한 믿음은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황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진심어린 충고를 했지만 황비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황족들은 결단을 내린다.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은 라스푸틴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그를 초대해 청산가리가 든 음식을 권하고 청산가리를 먹은 라스푸틴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에 공작은 라스푸틴을 총살하게 되지만 죽은 줄 알았던 라스푸틴은 벌떡 일어나서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놀란 황족들은 다시 총을 쏘았는데 두 번째 총알에도 죽지 않은 라스푸틴이었다.  이에 이마 한가운데까지 세발의 총을 맞고서야 라스푸틴은 사망한다. 황족들은 그의 손과 발을 묶어 강에 던져버렸다. 황실을 쥐락펴락했던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2월 혁명
황제는 전쟁에서 연일 패배하고 황비는 실의에 빠진 채 국정을 돌보지 않자 러시아 전역에 황실에 대한 분노가 솟구친다. 라스푸틴이 죽은 지 석달 뒤 혁명의 물결이 치솟았다. 오랜 전쟁과 굶주림에 지친 국민들은 더이상 참지 않고 거리로 나선다. 1917년 2. 26일 2월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굶주린 국민들을 대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시작된 혁명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엄청난 인파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휘날리는 붉은 깃발과 현수막에는 황제의 퇴위와 전쟁 종결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차르의 기념비와 교회의 종 등 전제 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철거하고 점점 커지는 혁명을 원하는 목소리는 커저갔다. 이에 황제는 피의 일요일과 같이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린다. 이때 대부분의 군인들이 사격 명령을 거부하고 공중에 총을 쏘니 채찍질을 하며 거듭 사격을 명령했던 장교를 군인들이 죽이고 시위대에 합류한다. 

 

황제 퇴위
황제는 수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기차를 타게 되고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황제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들의 혈우병마저 밝히며 제위 계승까지 포기했다. 이렇게 약 300년이라는 긴 사간에 걸쳐 거대한 제국을 이룬 로마노프 황조는 무너지게 된다. 1917년 3월 파란만장했던 황족의 삶을 내려 놓고 일반인처럼 살아간다. 황제의 퇴위로 권력의 공백을 임시정부가 메우게 된다. 

 

니콜라이 2세 황조의 마지막 모습

일반인이 된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은 수도에서 먼 지역 우랄지방으로 이송되고 몇달 뒤에 혁명 세력과 반혁명세력 사이에 러시아 내전이 벌어진다. 니콜라이 2세가 살아있으면 반혁명세력의 구심점이 될것을 우려한 혁명세력들은 황제 가족들을 지하실로 불러내서 일가족 모두를 총살시켰던 것이다.  황제 일가의 시신들은 아무도 모르는 외딴 숲에 매장된다.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총살된 현장


러시아는 치열한 내전이 3년넘게 지속되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1922년 내전의 승자가 된 레닌이 중심이 되어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켰다.  70년간 유지된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1991년에 연방 해제와 함께 푸틴의 집권이 22년째 이어지는 지금의 러시아에 이른다. 

러시아 간략 역사 (러시아는 영토를 어떻게 확장했나?)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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