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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두문불출 유래 /황희정승과 맹사성 이야기

by 365 ^^ 2021. 4. 6.

[선녀들 24회 중반]

 

맹사성과 절친 황희 정승의 파직 일화

 

맹사성과 황희정승은 절친이었는데 어느 날 둘 다 파직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황희 정승은 가족 관련 구설수가 많았다. 사위가 서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서달의 장인어른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급이었는데 장인 백 믿고 기고만장했으니 어느 날 지방 아전이 지나가는데 그냥 지나가버리자 인사 안 한 아전을 구타, 수하들을 시켜 매질했은데 그 아전이 사망했다. 그래서 지방관청에 갇히게 되고 이때 황희 정승이 맹사성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맹사성은 피해자와 합의를 보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돈을 주고 풀려난다.

 

사람이 죽으면 왕에게 보고가 가는데 세종이 알게 되어 세종은 둘다 파직시켜 버린다. 그 후 공사 구분 확실한 편인 세종은 당시 최고의 형벌인 노동형을 내리신다. 파직 후 2주 만에 복직시켜 평생 근로계약 체결한 것이다.

 

좌 황희 우 맹사성

'두문불출' 유래

두문불출 뜻: 집안에만 칩거하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태어난 황희는 고려 말에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급제를 했는데 나라가 망했다.그리고 새로운 왕조 조선이 건국된 후 퇴직 위기에 몰렸고 고려는 이미 타락했었다. 새 나라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황희는 지조와 절개를 지킨다며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황해도 '두문동'에 가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 황희정승 이야기

그곳에 있던 고려 충신들은 모두 불타서 죽고 황희 정승은 그전에 태조의 적극적 구애와 동료들의 권유로 마음을 돌려 조선의 요직을 맡으며 순탄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또 파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황희정승 유배 가다

이성계 태종에게 발탁이 되어 왔으나 황희는 적장자 원칙을 고수하며 첫째 양녕대군을 폐위하는 과정에서 셋째 충녕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자 태종의 노여움을 사 유배당하게 된다. 그래서 세종(=셋째 충녕)과 사이가 안 좋았으나 태종이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해서 옆이 두라고 조언하고 그렇게 황희는 세종에게 다시 복직하게 된다.

 

황희 정승의 노동형 형벌

황희 정승은 하루하루 늘어가는 일거리에 지쳐갔다. 그의 인생의 목표가 사직이었다. 모친상으로 사직을 청하면 세종은 고기 보내고 약도 보내고 하며 사직을 받아주지 않았고 아픈 척하고 상소를 보냈으나 그대로 반송되었다. 황희 정승은 이제는 노쇠하여 일하기 힘들다고 사직서를 제출하니 칠순의 황희에게 아직 죽을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국가를 위해 더 일하자고 반려했다. 그러다가 도승지 김돈(비서실장)에게 접근하여 사직을 어필한다.

 

 

 

 

 

 

김돈 도승지는 세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도승지 김돈 아뢰길:
황희가 귀와 눈의 어두움이 날마다 더해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이전부터 여러 번 원했던 사직을 요청을 모두 허락받지 못했기에 전하를 두려워해 감히 아뢰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종이 묻기를:

영의정이 과연 정신이 흐리고 눈이 어두운가? 너의 보는 바는 어떠하냐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겠느냐? 

 

이에 김돈 왈 

신의 소견으로는  귀는 어두우나 정신은 멀쩡하오니 집에 누워서 재택근무를 시키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황희 정승은 87세의 나이에 사직을 하게 된다.  세종 승하 1년 전에 사직을 한다.  그리고 황희정승은 90세에 눈을 감으신다. 왕과 함께 소신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부단히 나라를 위해 일한 성실함, 영원한 청춘으로 조선을 빛냈다.

 

 맹사성 이야기

북촌 한옥 마을 맹사성 집터

 

맹사성 집터 앞

 

맹사성의 청렴결백한 삶

'청백리'는 청렴결백한 관리를 뜻한다. 맹사성은 겸손의 아이콘이었다. 재상까지 간 분이면 위로는 세종대왕 밖에 없는 최고의 지위였는데 누가 오든 다 부하 직원일 텐데 손님이 오면 늘 예를 다해 옷을 갖춰 입고 손님을 항상 상석에 앉혔다.

 

재상을 가리켜 '만인지상 일인지하' 

만인의 위에 있고 한 명의 왕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이다.

 

 

 

 

 

 

 

 

 

검은 소를 탄 맹사성에 얽힌 이야기 

평상시에는 늘 말 대신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 평택 지역에 방문 예정이었는데 그 소식에 만반의 준비를 한 고을 사또였다. 그때 피리 불고 검은 소를 타며 웬 할아버지가 오니까 당장 비키라고 하라며 다른 길로 가게 했는데 사또에게 한양에서 온 맹고불이 이 길을 지나간다고 전하시오! 했지만 못 알아들은 포졸이었다. 사또 맹고불을 아세요? 고불은 맹사성의 호인데 사또는 놀라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검은 소를 탄 맹사성 그림

 

*북촌 동양문화박물관

당시에는 맹사성 집에 빗물이 샜는데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얻었을 텐데 그만큼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현재 집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맹사성 집터의 일부에 설립한 '북촌 동양문화박물관'이 있다.

맹사성 집터의 일부에 설립한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박물관 2층은 북촌 한옥 마을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

박물관 2층은 북촌 한옥 마을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로 시야가 탁 트여 아래로 경복궁과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경복궁이 보임

박물관 2층.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맹사성의 집터이다. 

한옥마을 지붕이 보이는 탁 트인 시야

스승인 맹사성을 존경하는 세종대왕은 맹사성의 집 등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주무셨다고 한다.  그의 소원은 사직이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76세까지 일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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