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내용) 윈스턴 처칠 총리 되기까지 /앤젤리나 졸리가 소장했던 처칠의 그림은 무엇? (64-2)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마침내 처칠과 히틀러가 맞서 싸울 시간이 다가왔다. 처칠이 영국의 총리가 되는 순간 프랑스 함락을 눈앞에 둔 히틀러는 영국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처칠에게 주어진 위험천만한 세기의 작전 하나가 주어진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연합군들이 탈출한 장소 됭케르크에서의 작전은 처칠과 연관이 있다. 세기의 철수작전이라고 불리던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2차 세계대전에서 처칠의 리더십을 처음으로 시험대에 올린 작전이다.
됭케르크 작전 이전 상황
처칠이 총리가 된 1940년 5월 10일 이때 동유럽을 장악한 히틀러는 방향을 바꿔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고 독일군이 기갑부대를 앞세워 (전격전) 기갑부대를 앞세워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 아르덴 숲을 통과한다. 단번에 영국령까지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유럽 최고의 육군을 자랑했던 프랑스였지만 막상 독일의 진격이 시작되니 프랑스군은 맥없이 밀리게 되었다.
독일의 기갑부대
기갑부대란 그때 당시 기갑부대란 탱크 로만 이루어진 기갑사단으로 빠르게 공격하는 전술을 이용했는데 당시만 해도 탱크는 보조무기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이전 전투와 달리 탱크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에 모여있던 연합군 40만명은 갑자기 포위되고 몰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처칠은 1940년 5월 20일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진행한다. 성공 가능성이 십 프로 미만이었는데 갑자기 해안으로 진격하던 독일 부대가 진격을 멈춤다. 이것은 1940년 5월 24일 일이었다.
사실 독일군은 빠른 진격으로 인해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히틀러가 왜 기갑부대의 진격을 멈추라고 했던 이유에서는 미스테리이다. 군수물자 배급을 위해 잠시 멈췄다는 설과 너무 빨리 진격한 독일군의 선봉에 안전을 위해 속도를 늦췄다는 설이 있다. 처칠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독일군이 진격을 멈춘 3일 동안 연합군은 됭케르크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1940년 5월 26일 처칠은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명령한다.
됭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
처칠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명령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배를 모으는 것이었다. 40만명의 연합군을 빨리 수송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박 징발령을 내렸고 영국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섰다. 화물선이나 어선은 물론 개인용 요트, 학교 실습선 등 연합군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선박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민간 선박까지 모두 참여했던 작전이었다.
됭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들은 바다를 헤엄쳐 하나둘 구조돼었다. 연합군이 대규모 철수작전을 하는 동안 히틀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실 히틀러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후 5월 26일 기갑부대 정지 명령을 철회했고 다시 연합군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고 됭케르크 각지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독일 공군까지 동원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영국 전투기가 지원사격을 하면서 연합군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독일 공군의 맞서 싸웠다. 그래서 수많은 병력이 영불해협을 건너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고 총 338226명의 병력이 탈출했다.
됭케르크 정신
됭케르크란 단어만 들어도 영국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생각을 한다.
처칠은 약 22만여 명의 영국군과 11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구출했다. 총 34만명을 구출하면서 승리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지만 4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는 등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됭케르크에 두고 온 물자 피해와 영국 공군의 막대한 피해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수십만의 병력이 생존하면서 영국은 다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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