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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윈스턴 처칠 총리되기 까지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했던 처칠의 그림은 무엇? (64-2)

by 365 ^^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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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얼마나 금수저 집안이길래..) 64 -1

 

처칠은 언제부터 영국인들에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을까?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에서였다. 이 전쟁은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는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뺏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들이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 및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처칠 종군기사로 참여한 보어전쟁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이였기 때문에 손위운 승리를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고전을 했고 이때 처칠은 종군기사로써 보어전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처칠은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계속 글을 쓰고 했기 때문에 자원해서 종군기사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처칠이 작성한 실제기사
당시 처칠이 작성한 실제기사

 

그러던 어느 날 처칠이 탄 열차를 보어인들이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포어인들에게 포로 잡히게 된다. 하지만 곧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수용소를 탈출하게 되고 도망치다가 지나가던 화물 열차에 몸을 숨긴다. 처칠이 도망친 것을 안 보어인들이 처칠을 잡아오면 25파운드를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게 되면서 영국에 이 이야기가 알려져 처칠은 보어전쟁을 통해 전쟁 영웅으로 유명해진다.  

 

당시 포로로 잡힌 처칠
당시 포로로 잡힌 처칠
실제 배포된 처칠의 수배전단
실제 배포된 처칠의 수배전단

 

윈스턴 처칠의 정치 입문

 

이에 힘입어 처칠은 정치에 입문한다. 처칠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1900년 총선에 출마한 처칠은 랭커셔 올드햄에서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승승장구한 처칠은 1908년에는 32세의 나이로 국제 무역을 담당하는 통상장관에 임명된다.  통상장관-경제장관-내무장관을 거치면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의 나이 37세에는 해군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의 수장이 된다.   

 


처칠의 위기
그러나 처칠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때는 처칠이 4년째 해군장관직을 이어가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 직후 오스만제국이 영국에 주문했던 전함 2척을 주지않고 영국이 사용하자 이에 화가난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던 오스만 제국이었기 때문에 연합국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이로인해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의 군수물자 지원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처칠의 오스만 제국 공격 결정
이에 처칠은 오스만 제국을 직접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오스만군이 바다에 설치한 기뢰에 부딪쳐 함대의 일부가 파손이 되고 육군과 해군이 연합해서 해안에 상륙했으나 더이상 전진할수 없는 지형이었다. 

 

당시 갈리폴리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당시 갈리폴리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당시 갈리폴리 해변의 주변은 모두 산이었고 고지대에 있던 오스만군 포대가 폭격과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상륙과 동시에 오스만군의 공격을 피할수 없었다. 이 전쟁으로 사상자 수가 약 20만명으로 대패했던 전쟁으로 인해 처칠은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래서 처칠은 해군장관직을 사직했다.  


안젤리라 졸리는 어떻게 처칠의 그림을 소장했나? 

그 이후 처칠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처칠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한 작품으로 2011년부터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하던 작품을 2021년 경매를 통해 1150만 달러 (한화 약 130억)에 팔린 작품이다. 처칠의 그림 중 최고가를 기록한 그림이다. 

 

처칠의 그림그리는 모습
처칠의 그림그리는 모습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 처칠작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 처칠작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들에게 이 그림을 상속했고 이후 다른사람에게 판매된 작품은 미 국립 처칠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2011년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하게 된다. 이후 최고가로 경매에서 팔린다.  처칠이 우울증에 시달리며 그림에 몰두했던 10년간( 1929~1939) 이 기간은 처칠 스스로가 광야의 시기였다. 고 말할 정도로 처칠 인생에서 바닥을 찍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처칠을 다시 부활시킨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다. 1933년 독일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1935년 독일 재무장 선언하고 유럽 침공을 침공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다음 타킷으로 삼았다.

뮌헨회담
처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슈데텐란트 지역을 요구했고 여기에 독일어를 쓰는 주민들이 있었으나 슬로바키아는 강하게 반발했고 전쟁 직전까지 상황이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잘못하면 또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이 감지한 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정상들이 모여서 뮌헨 회담을 연다.

 

뮌헨회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영국 프랑스는  슈데텐란트를 분리해 독일에 합병하는 대가로 체코슬로바이카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 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실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초대 받지도 못했다.

 

뮌헨회담에서 무슨일이? 

영국과 프랑스는 오히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홀로 독일과 싸울 수 밖에 없다면서 히틀러의 뜻을 관철시킨 걸 도와준다. 그리고 히틀러와 뮌헨에서 협정을 맺고 돌아온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체임벌린은 영국 국민에게 이 회담의 결과를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왔고 우리 시대의 평화가 찾아왔다 라고 했다. 그때 당시 영국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큰 충격, 아픔을 절대 재현하고 싶지 않은 것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든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칠은 당시 여론과는 정반대 평가를 했다.  하원 연설에서 ‘ 이 협정은 완전한 패배’ 라며 체임벌린을 비판했다. 사실 처칠이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그를 주시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게 1933년인데 1930 년부터 히틀러의 야욕과 그의 반유대적 성향에 대해서 경고했고 이에 대비한 군비증강을 주장했는데 처칠의 의견대로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나머지 부분을 차지했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결국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이 됐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야욕을 경고했던 처칠을 다시 보게 된다.  

 

 

윈스턴 처칠 총리되다. 

그리고 처칠은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되고 노르웨이가 함락되고 유럽 서부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영국 체임벌린은 총리직을 내놓게 되고 처칠은 66세 때 영국의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된 처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야당을 초청해 연합 정부를 만드는 일, 거국일치 내각을 만들었다. 비상사태나 전쟁같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파를 초월하여 조직한 내각을 말한다.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서 반대 세력까지 포섭해 영국 국민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해군 육군 공군 등 전쟁 업무가 분산되어 비효율적이었던 조직을 총괄하는 전쟁부를 창설해 처칠 스스로 총리이자 전쟁부 장관을 겸임하면서 전쟁을 책임진다는 이미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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