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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나당 전쟁 (영화 평양성 배경/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한계, 의미)

by 365 ^^ 2021. 9. 23.

나당 전쟁 이야기 

2003년 영화<황산벌> 8년 간격 고구려 멸망하는데 2011년 고구려 멸망을 다룬 영화 <평양성> or Kbs 칼과 꽃이 <황산벌> 다음 이야기인 고구려 멸망을 다른 내용라고 할수 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당 사이에 양다리 외교를 하고 있었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에 652년 이후 당과 백제는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의자왕과 김춘추의 복수극(백제 멸망 과정)

 

 

 

 

고구려 멸망 원인 배경 (영화 평양성 배경)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642년 고구려 대신 백여 명을 죽이고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의 독재로 인해 고구려는 위기 상황에 연합해 대처가 불가능한 시스템이 되었고 독재정치 장기화로 인한 지방 세력과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대막리지에 취임해 권력을 장악하지만 남생 지방 순찰 중 두 동생(남건, 남산)이 정변을 일으켜 평양에서 남생의 아들까지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 첫째 남생(윤제문), 둘째 남건(류승룡), 막내(강하늘) [영화 평양성]

 

남생의 당나라 투항

이에 남생은 결국 국내성으로 피신 후 국내성 등 6개의 성, 백성 10만 호를 이끌고 당에 투항한다. 남생은 고구려의 기밀을 당에 누설하고 국내성 지역을 전진기지로 당에 제공하는 한편, 평양성 공격의 선봉장으로 당군 진격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 덕분에 당고종에게 높은 벼슬을 받은 남생이었다. 식읍 3천 호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다. 

 

나당 연합

평양성 함락 직전 왜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왜에 사신을 파견한 신라였다. 이후 신라와 왜는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평양성 전투(668년 9월)

반면에 차남 남건은 끝까지 평양성에서 저항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한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망 후 세 아들의 내분으로 분열되고 있었고 나당연합군 공격에 약 한달만에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수나라 수양제 백만대군과 당태종도 막아냈던 고구려였지만 668년 9월 멸망한다. 

 

 

나당 전쟁 배경  

나당 전쟁의 책임은 당나라에 있었는데 648년에 동맹을 맺기 위해 신라 김춘추는 당 태종을 찾아가서 전쟁에 승리하면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주는 것으로 밀약을 맺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던 당나라였다. 밀약의 내용은 당나라 측 사료에는 없고 삼국사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문무왕(=신라태자 김법민)은 당나라 장수 설인기에게 쓴 편지(일종의 외교문서)에 당과의 밀약 내용을  적고있다 .

 

당나라는 660년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면서 항복한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웅을 웅진도독부 수장으로 임명한다.

 

 

취리산의 회맹식

663년 신라 금성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계림도독부 수장으로 임명하면서 668년 7월 취리산에서 백제 의자왕 아들 부여웅과 패망한 백제와의 화친을 강요당한 신라 문무왕이었다취리산의 회맹식은 신라의 치욕이었다. 

 

 

당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신라는 669년 백제 지역의 당군을 공격해 백제 땅을 조금씩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는 당에 대한 공격을 차근히 준비를 했었다. 선제 공격전에 669년 신라의 대대적이 죄수 사면, 구휼작업이 이루어진다. 당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을 확보해 놓은 신라였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가 그려져 있는 지도에는 백제의 옛 땅이 모두 웅진도독부로 표시가 되어 있다.

 

고구려 유민을 도와주면서 당을 공격해 나갔다.  그러나 이 일은 당 고종이 알게 되고 신라는 당 고종의 분노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사신 김흠순과 베테랑 외교관 김양도를 보내게 된다. 당 고종은 신라 사신을 장안에 억류시켜놓고 신라가 차지한 옛 백제의 땅을 돌려줄 것을 압박한다. 당 고종의 말을 전하는 조건으로 김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게 되고 당 고종은 신라, 백제의 영토 경계를 재구획을 명하는 칙서도 함께 보낸다. 

 

 

신라의 당 공격(670년 3월)

같이 보내진 사신 김양도는 장안 감옥에 억류된 후 숨지게 된다. 이에 670년 3월 신라 문무왕은 당을 상대로 선제공격에 나선다. 신라 설오유 부대에 합류한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 부대는 각각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의 오골성을 공격한다. 당을 쫓아내게 위한 7년간의 나당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신라는 당나라 주력부대가 있는 요동성을 공격해 당의 시선을 요동지역으로 돌리고 그 틈을 이용해 옛 백제 땅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려 했던 작전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670년 6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668년)해 식민통치를 했고, 고구려 유민 20만 명을 강제 이주, 다음해에도 고구려 유민 15만명을 이주시키면서 가혹하게 고구려 유민을 통치했던 당나라였기에 고구려 유민들은 옛 고구려땅에서 당을 축출하기 위해  신라의 도움을 받아 노력을 하게 된다 . 

 

670년 전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검모잠이 보장왕 외손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670년 6월에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고구려 부흥세력은 옛 백제 땅 금마저(현 전북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고 안승을 보덕국의 왕으로 책봉 후 본격적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해 당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선전 포고와도 같은 편지를 보내고 고구려 유민과 연합해 신라는 당을 계속 압박하게 된다. 

 

 

신라 석문전투 672년 

672년 황해도 백수성에서 대승을 거둔 연합군은 후퇴하는 당군을 끝까지 추격하지만 황해도 석문 근처에서 당군에게 역습을 당한다. 이때 신라장수 7명이 전사한다. 이 석문전투 당시 공을 세우기 위해 신라의 여러 부대가 서두르게 공격하다가 결국 당의 매복 작전에 걸려 대패하게 된다. 

 

 

석문전투 패배 후

석문전투 패배 후 위기의식을 느낀 문무왕은 자신이 신임했던 김춘추(당시 78세)와 상의 후 방어 전략을 취한다. (김유신=문무왕의 외삼촌) 김유신은 673년 7월 7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문무왕은 당 고종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쓰고 당의 포로를 송환 및 많은 곡물을 보내며 사죄의 편지를 보낸다.  석문전투 직후 당의 진격을 막고 향후 전쟁 준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 편지였던 것이다. 

 

 

신라의 전쟁 준비

나당전쟁 당시 신라가 축조한 남한산성(당시 주장성) 포함 10개의 성을 쌓고 다오가의 전쟁을 대비했다. 674년 9월 문무왕은 직접 군대를 사열했다. 또한 내부적으로 친당 귀족세력을 제거하면서 백제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한다.

 

남한산성 포함 10개의 성을 쌓고 당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신라였다.

 

당시 신라 군대 전술

당 군대의 기병부대는 유목민 거란병, 말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나라 군대의 중요 비중을 차지했었다. 이를 상대로 신라군이 펼쳤던 전술이 있다. 

 

신라의 장창당

삼국시대 보병은 한 손엔 방패 한손엔 창을 들고 있었는데 한손으로 창을 다뤄야 해서 2~3m 길이의 창을 사용했던 반면 672년에 창설된 신라의 특수부대 장창당(긴 창을 쓰는 부대)이 있었는데 장창당이 사용한 창의 길이는 5~6m 예상된다. 

 

 

육화진법 전투

육화진법의 전투 방법은 먼 거리의 기병을 향해 궁수가 화살을 발사하고 기병이 근접하면 장창수가 저지, 그때 쇠뇌수가 적군을 정밀, 조준 사격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신라의 신무기 천보노 (천보 거리를 날아가는 노=쇠뇌) 

 

또한 신무기 천보노를 개발했다. 일반 노궁=120보정도 날아가는 것에 비해 천보노=1000보, 8.3배 더 날라가는 것으로 먼 거리 기병의 갑옷까지 뚫는 위력을 가진 천보노이다. 

 

매소성 전투 (675년 9월)

신라군이 매소성(매소성 위치는 현 동두천, 양주, 연천 지역으로 추측)에서 당나라 주요 부대를 공격한다. 3만의 군사로 당나라 20만 대군과 맞선 신라군이었으나 신라가 승리한다.

 

기벌포 전투(676년 11월)

약 1년 뒤 676년 11월 전쟁에 주도권을 잡은 신라는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 함대를 공격한다. 22번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결국 당을 물리친 신라였다. 

 

 

나당 전쟁의 여파

7년의 나당 전쟁을 끝내고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였다. 매소성은 원래 고구려 옛 영토로 이 전투에서 고구려 유민의 도움을 많이 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기벌포 해전 승리로 완전히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당군 축출이상의 의미가 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는데 신라와의 나당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력이 쇠약해 졌고 당나라 북방 돌궐이 부흥하면서 당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또한 요서 지역 영주에서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 반란의 여파로 고구려 유민 중심의 발해를 건국(698년)게 된다. 

 

 

신라 삼국통일에 기여한 인물들

 

문무왕

문무왕(=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은 외교나 국제관계에 상당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 백제 멸망 후 양국의 유민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문무왕의 유언인 '바다에 묻어달라'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릉)

 

성덕왕

삼국을 통일 한뒤 60여년이 지난 735년에 성덕왕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평양 이남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대동강 이남의 땅을 확보한 신라였다. 나당전쟁 직후 당과의 긴장 관계가 끝나지 않아 신라는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성덕왕때 활발한 외교를 통해 당으로부터 실리를 얻어낸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국보제29호)로 성덕왕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771년에 만든 종이다. 

   

삼국통일 한계와 의의

동아시아 삼국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이다. 신라의 실리 외교정책, 신라 삼국통일의 한계점인 외세의 힘을 빌린 통일과 고구려 요동지역을 상실한 것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김춘추, 김유신을 매국노로 평가 (독사신론/조선상고사, 1908년) 했다.  물론 고구려 유민 상당수가 우리 민족 구성원에서 배제되고, 고구려 영토 상당부분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삼국통일 이후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한민족의 형성, 통합에 크게 기여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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