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시작은 금성사였다. 1959년 국내 최초 라디오 A-501을 생산을 시작했고 1962년 첫 수출에 성공한다. 이후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등을 국내 최초로 연이어 개발하고 국내 전자산업을 주도한다. 1966년 국내 최초 흑백 tv개발에도 성공한다.
1966년 흑백 TV를 최초 개발 19인치 흑백 tv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9만 8천 원 정도였는데 이는 1966년 도시 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1만 1750원이었다. 그렇다고 돈이 있다고 다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급이 부족해 공개추첨을 통해 당첨된 사람만 tv를 가질 수 있던 시절이다. 이에 삼성 전자는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창업하고 전자 산업 진출에 뛰어든다. 두 기업은 이렇게 전자 업계의 최고 라이벌이 된다.
1980년대 럭키금성에서 1995년 이후 LG로 회사명이 변경되었다.
호암 이병철 회장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 출생, 진주 지수 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성의 시작은 대구에 삼성상회라는 회사를 3만 원 지금으로 따지면 3억 원 정도를 들여서 설립했다. 주로 청과물, 건어물을 만주 북경지역에 판매하는 무역업을 주로 했다. 이때 삼성상회에서 별표 국수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939년 삼성상회 성공에 힘입어 조선양조를 인수하게 되고 1953년에 제일제당을 설립하고 최초로 국산 설탕 생산을 시작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한다. 이때가 삼백산업(세 가지 흰색 생산품:설탕, 면직물, 밀가루)을 키울 때였다. 1950년대 미국 등의 원조 자금 및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분, 제당, 면방직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금성 구인회 회장
금성 구인회 회장은 전자 사업 이전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 치약, 비누, 샴푸 등 생필품을 만드는 회사를 설립, 1947년 최초의 여성용 국산 크림 럭키 크림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둔다. 럭키 생필품은 독점성이 있었다.
** 럭키 크림이전에 두산의 박가분이 있었다. 1916년 국내 최초로 제조 및 판매된 화장품으로 두산 창업주 박승직, 즉 박 씨 가문이 만든 분이라는 뜻에서 박가분으로 이름 지었다.
금성 최초 국산 라디오 1호 출시
이후 1958년 전자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고 부하직원이 듣던 전자 레코드판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생산하겠다고 결심, 금성사 창업 1년 만에 국산 제1호 라디오를 개발한다. 이때 정부정책이 또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정부정책과 맞물려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금성 국내 최초의 백조 세탁기 출시
1969년 금성은 당시 최고의 톱스타 광고를 찍은 상징적 전자제품인 세탁기(=백조 세탁기)를 출시한다. 당시 금성사의 위상은 직원수가 6천명으로 10년간 전자 산업에서 독주를 했던 금성이다. 그리고 삼성은 전자산업에 뛰어든다.
삼성과 금성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기 시작한 것이 TV 사업이었다. 1970~1974년 사이 삼성이 출시한 tv모델만 무려 48종에 이른다. 1970년대 금성의 tv 생산량은 5만 대 수준이었으나 1978년에는 118만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삼성의 엄청난 물량공세로 1979년 말 내수시장에서 삼성이 1위를 쟁취하고 수출 분야에서도 삼성이 앞서기 시작한다.
이후 두 회사는 광고 경쟁으로 과열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는 외국 기술력에 밀리던 국내 제품들이었기 때문에 두 기업의 경쟁은 산업 발전을 가져왔지만 한계에 봉착한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까지도 외제에 대한 제품이 우세였다. 현재는 이 두 그룹이 세계화에 성공하면서 전 세계에 위상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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