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5회 3]
오늘의 탐사지: 강화도 고려산 홍릉
주제: 몽골의 6차 침략 과정
출연자: 설민석
강화 홍릉
강화도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고려 23대 왕 고종의 능인 강화홍릉이 있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은 북한에 있으나 고려 고종의 재위 기간은 1213~1259년으로 몽골 침략 시기에 재위했던 왕으로 강화도에 안장되어 있다.
고려의 고종 왕릉은 왕릉치고는 규모가 작다.
조선시대 26대 왕 고종과 이름뿐아니라 무덤 이름까지 똑같다. 그래서 고려 고종의 왕릉은 강화홍릉이라 부른다.
몽골 침입 때 강화도는 간척 사업을 하기 전 이여서 좁은 해안선과 빠르고 강한 물살로 외부의 침입이 힘들었던 섬이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렸던 강화도였지만 강화천도 후에도 몽골은 끊임없이 침략한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 자세히 보기
최우 집권기에 몽골은 저고여 살인사건을 명분으로 몽골의 살리타는 고려를 침략한다. 귀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개경이 함락되면서 1232년 6월 최우는 몽골 침입 1달 뒤에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한다.
승려 김윤후의 처인부곡민의
처인성 전투
몽골군은 용인의 처인성까지 들어오고 정규군조차 없던 처인성에서 백성들은 몽골군과 맞선다. 용인 처인성 부근에 살던 백성들이 2차 침입한 몽골군을 막아내는데 일반 백성들을 이끈 승장은 승려 김윤후였다. 김윤후를 중심으로 고려 백성들이 몽골과의 항전한다.
2차 침입은 승려 김윤후의 활약으로 몽골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거란이 침입했을 때 만들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경전인 대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1011년 ~ 1087년), 속장경이 모두 소실된다.
11세기 고려 최초의 대장경 초조대장경을 만든 후 거란이 물러나자 부처의 힘이 적을 무찌른다고 생각해 다시 몽골의 3차 침입을 계기로 대장경을 만들어서 몽골군을 물리치려 했고
이때 만들어진 것이 팔만대장경(1236~1251)이다.
김윤후 충주성 전투
몽골의 2차 침입때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가 21년 후인 충주성 전투에서도 활약을 하고 있었다. 2차 침입 처인성 전투때 상장군직인 높은 벼슬을 거부하고 변방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김윤후는 변방을 돌며 지내다 몽골 5차 침입때 충주성에서 방호별감으로 재직중 몽골과 다시 한번 맞닥드린 것이다.
그러나 기약없이 계속된 전투에 백성들은 지쳐가고 백성들의 사기가 꺽이는 것을 보자 김윤후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렇게 2번이나 몽골군을 맞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김윤후다.
죽은 사람들은 땅에 묻힐 수 없었고 몽골인이 지나가는 곳에는 셀 수 없는 시체 더미로 가득했다. 힘없는 백성들은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고려는 점점 피폐해졌다.
후계자 싸움 중이던 자신에게 인사를 온 고려의 태자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환대를 한다.
원종의 왕권 강화 정책
이때가 여전히 무신 정권기로 무신 김준이 세력을 쥐고 있었다. 김준은 원종의 친몽 정책을 반대했고 이에 원종은 김준을 제거하려 한다.
원종의 계획대로 임연이 김준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종이 몽골을 등에 업고 왕권 강화에 힘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해 한다. 지난 100년간 무신이 왕위에 있었으므로
왕이 무신 위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이에 임연은 권력 유지를 위해 원종을 폐위 시킨다.
원종의 되찾은 왕권
당시 몽골에 있던 원종의 아들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아버지의 왕권 복위 도움을 요청하고 몽골의 군사력을 빌려 원종은 왕권을 되찾는다. 이후에 임연은 원종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움에 떨며 지내다 그만 등창이 나서 죽음을 맞이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