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은 북방 민족 중에 최초로 중국 대륙의 일부를 점령하며 최초의 정복왕조로 불린 대제국을 건설했다. 거란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약 300년대 중반 약 4세기 중반부터이다. 거란은 중국 변방의 바린좌기에 머물렀던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민족이었다. 다양한 세력 가운데 바린좌기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거란족은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생활하는 몽골족 계통의 민족이다. 대부분 척박한 땅에 살면서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유목생활을 했다.
거란 유목민 특징
크게 8개의 부족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질랄부족이 통합하여 거란을 세우게 된다. 유목생활만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부족한 자원을 위해 주변 부족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곡물과 재물뿐만 아니라 가축과 사람가지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말을 잘 다루는 거란족에게 말을 타고 뒤로 돌아 활을 쏠수 있는 특별한 전투 기술이 있었다.
이런 특유의 기마술을 통해 거란족은 스스로를 강철과 칼의 민족이라고 부를 정도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또란 거란족은 큰 말을 타지 않고 이동거리가 두배 긴 조랑말을 탔다고 한다.
거란족 곤발과 북방민족 변발 비교
거란 최초의 황제 야율아보기
독자적인 방법으로 군사력을 키워가던 거란족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10세기 초 마침내 나라의 운명을 뒤집은 강력한 지도자 거란 최초의 황제 '야율아보기' 가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야율아보기는 키가 약 2m에 다랐고 180kg에 달하는 활을 자유자재로 다뤘다고 한다.
916년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모두 진압을 하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며 거란을 건국한다. 거란은 시대에 따라 '요나라' 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유목민의 생활을 고수하고 강력한 나라를 형성하기 위해 수도를 옮겨다니며 운영했다. 다.
거란의 문화
약 4000명의 엄청난 군대와 이동하는 날발의 모습은 황제의 위엄과 인근 지역이나 주변국에는 적지 않은 위협을 줄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건국 초기 문자가 없던 상황에 황제 야율아보기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한족의 문자인 한자를 참고해 문자를 창제한다. 국가 종교는 불교였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불탑을 만들었다. 현재 중국에 있는 불교 탑 중 크기가 두번째로 큰 탑이 건란족이 만든 중경대탑이다.
5대 10국 시대
그렇게 거란은 변방 민족에서 한 나라로 성장했고 영토 확장을 위해 거란이 가장 먼저 노린 곳은 중원을 향해 남쪽으로 진출을 시도한다. 당시 중원의 상황은 907년 당나라가 멸망 후 중국대륙에는 크고 작은 나라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던 상황이었다. 907년~979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5개의 왕조와 여러 지방정궈의 흥망이 거듭된 정치적 격변기를 틈타서 야율아보기는 중원 정복에 나선 것이다.
발해의 멸망
그러나 중원을 정복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점령할 대상을 발해로 바꾸게 된다. 발해는 698년~926년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건국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며 동북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발해를 거란족은 공격했고 전쟁 시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926년 발해는 거란족에게 멸망한다.
그런데 926년 전쟁 후 귀국하던 야율아보기가 55세의 나이로 돌연 병사한다. 거란의 장럐풍습 중 황제가 사망하면 황제를 미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거란족은 저승에서 재생하기 위해서 온전한 육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포 풍습을 통해 미라를 만들었다.
시신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금속망으로 감싸고 얼굴에 금속 가면을 씌워 미라를 완성했다. 얼마전 수행 자세의 상태로 장기만 적출된 미라를 불상에서 발견했다.
거란과 송나라 전쟁
후당의 다음 나라가 후진이고 후진의 건국을 도와 준것이 거란이었다. 거란이 도움이 고마웠던 후진의 황제는 연운 16주 만리장성 남쪽을 거란에 햘양했다. 이곳은 농경지여서 안정적인 경계적으로 바탕을 다시 한번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960년 송나라가 등장하면 거란의 거침없는 행보에 제동을 건다. 송나라는 조광윤이 건국한 왕조로 차츰 세력을 확대하면서 결국 분열되었던 5대 10국을 통일한다. 송나라는 수도 변경 가까이에 위치한 거란이 눈엣가시였다. 또한 중원의 땅이 유목민의 손에 있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송나라는 땅을 되찾기 위해 거란과 전쟁을 선포했고 두 나라는 10년 이상 전쟁을 벌였다.
야율융서 등장
그리고 거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거란의 6대 황제 야율융서가 12세에 등장한다. 나이가 어려 어머니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던 송나라는 거란을 대대적으로 공격을 준비한다. 이를 감지한 거란은 고려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고려에게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원수였다. 거란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만부교 낙타 사건 이후 982년 야율융서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거란과 고려는 약 40년간 단절된다.
거란은 고려의 서희와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어주고 침공 2개월 후인 993년 12월에 고려의 영토 확장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후 고려와 거란이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되고 999년부터 거란과 송나라는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 5년 후 1004년 야율융서의 어머니 승천 황태후가 직접 갑옷을 입고 직접 쳐들어가서 형제 관계를 맺게 된다.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매년 보내게 되는 전연의 맹약을 맺게 되면서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국이 된다.
이후 승천황태후가 병으로 쓰러지게 되고 야율융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2차 고려 침략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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