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5천 년의 긴 역사 속에서 여러 민족이 싸우고 합치며 오늘날의 중국이 되었다. 분열된 여러 나라에서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되었던 천하를 통일한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의 황제 진시황과 그의 진나라 통일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국 시안은 유구한 역사만큼 약 70여 명이 넘는 황제들이 살았던 도시로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이다.
중국 차이나(china)의 유래 (기원)
중국은 임금을 황제라고 부르는데 황제의 처음 창시자가 진시황제이다. 진시황제 - 첫 번째 (처음 시) 황제라는 의미에서 진시황제이다.
China라고 하는 것은 진나라 [chin]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chin)이라는 국호가 로마로 건너가서 서양사람들이 차이나[China]로 부르기 시작했다.
진시황 이전 시대 상황
진시황은 기원전 200년대 인물로 사마천이라는 학자가 쓴 3천 년에 달하는 중국 통사<사기>에 진시황제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천하의 대세라는 것은
나뉨이 오래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합쳐진 상태가 오래되면 반드시 나뉘어진다.
중국 영토의 통일과 분열이 반복됨을 의미하는 문장이다.
진시황 이전에 중국은 7개의 나라(진,조, 위, 한, 제, 연, 초)로 나뉘어 있었고 여러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이 시대를 전국 시대라 부른다.
7개의 나라는 수 백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었고 귀족과 백성은 모두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비결
첫째 뛰어난 인재 등용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적극 수용해 다른 나라에 비해 타국 출신 신하가 많았고 그중에 '이사'라는 인물은 진시황이 중국 통일을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초나라에서 온 '이사'의 조언대로 진시황은 중국 통일을 결심한다. 각 나라의 왕들을 황금으로 설득하고 매수에 실패하면 실세들은 죽인다는 이사의 단호한 전략을 받아들여 시행하는 것은 물론 여러 나라를 이간질시키는 전략으로 분열된 국가들을 하나씩 각개 격파해 나가는 방법이었다.
둘째 엄격한 법과 냉철한 통치력 (법치주의)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유가의 기본 믿음 성선설과 법가의 성악설을 바탕에 둔 법치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사상 중 진나라는 법가의 성악설을 채택해 엄격한 법치주의로 나라를 다스렸다.
부국을 위해 20세 이상 남자는 분가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귀족의 혜택을 없앴고 20등급을 만들어 공을 세우면 성과에 따라 상과 벌을 규정대로 분명하게 주었다. 그렇게 때문에 지위고하, 친분 여부와 관계없이 출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했다.
셋째 진나라의 지리적 위치
당시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는 '중원'으로 진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해 있던 나라였다.
외래 민족의 침입도 있었지만 실크로드의 길목, 문명의 교통로에 위치 서역과 밀접해 외래 문명에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도 있던 지리적 위치였다. 변방이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다양한 문화와 산업을 발전시켰다.
진나라 통일 순서
▷한, 위, 조, 연나라 멸망
이렇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며 다양한 인재를 등용함은 물론 법치국가의 기회의 균등을 통해 뛰어난 전략과 압도적 군사력으로 옆에 위치한 한, 위, 조, 연나라를 무너뜨렸다.
▷초나라 멸망
그다음으로 천하통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초나라 침략을 계획하게 된다. 당시 초나라는 진나라만큼 강했던 나라였다. 이에 진시황제는 장군들을 모아 군사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의논한다. 20만의 군사를 대동해 초나라를 공격하지만 실패한 후 다시 60만 명의 군사를 출병해 초나라 왕을 사로잡고 승리를 거둔다.
▷제나라 멸망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제나라 뿐이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진나라는 제나라가 항복하면 500리의 땅을 하사하겠다고 설득한다. 이에 궁지에 몰리자 진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나라가 항복을 하게 만든 후 제나라 왕을 멀리 추방 보내고 굶겨죽인다. 진시황제의 냉혹한 면모가 보인 일화이다.
이렇게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의 나이는 불과 39살이었다.
통일 이후 진시황 업적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제는 통일 이후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다.
▷최초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
첫 번째란 의미로 처음 시를 붙여 본인은 시황제라 칭했고 자식들은 이세 황제, 삼세 황제라 불리면서 '만만세'까지 가려고 했다.
▷체제통일
진시황제는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면서 각기 달랐던 국가의 체제들을 통일한다.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 위, 감을 두었다. 황제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는 정치 시스템이었다. 중앙집권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스템은 이후에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오늘날 중국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글자(문자)의 통일
법과 제도를 시행하는데 걸림돌이었던 각계의 문자를 통일시킨다. 이후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게된다.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
통일 이전 나라별로 다르게 사용되었던 부피와 길이 무게의 단위를 균일화함으로써 상품의 매매나 세금징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지역별로 다르게 통용되던 화폐를 반량전이라는 화폐로 통일한다.
▷도로망 확충과 재정비 (치도와 직도)
치도와 직도를 만들어 방사선형으로 뻗친 도로 치도를 이용해 황제의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고
군사전용 도로 직도를 이용해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빠르고 신속한 진압이 가능했다.
진시황의 업무처리 방법
진시황제는 황제로 있는 12년 동안 한번 떠나면 약 1년 정도 걸리는 시찰을 약 5번 정도 다니며 자신의 업적과 권위를 백성들에게 알렸고 이로 인해 그는 상당한 업무량을 처리해야 했다. 이에 진시황제는 저울에 대나무로 만든 '죽간'의 무게를 달아 하루에 처리해야 할 업무량을 정해 놓았다고 한다.
잘라놓은 대나무에 글을 쓰고 여러 개를 꿰면 책이 되는데 한자로 책 책이라는 글자는 바로 죽간의 모양을 따서 만들 글자이다.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고 직접 모든 상소문을 처리한 것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황제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진시황의 폭정
진시황의 대표적 폭정의 예로는 만리장성 축조와 분서 갱유 사건이 있다. 만리장성 축조 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 부담과 함께 강제노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또한 분서(책을 태우다) 갱유 (유생을 산 채로 파묻다) 사건으로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유생을 산채로 파묻어 죽여버리는 진시황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다.
진시황의 큰아들은 이러한 극심한 권력 남용을 염려하여 진시황제에게 간언 하지만 이런 큰 아들 '부소'마저 변방으로 내쫓아버린다. 결과적으로 진나라 왕조의 통치 기반을 무너트리고 백성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된 사건들이다.
진시황은 말년에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불로불사의 꿈을 꾸기도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진시황제였다.
진시황 죽음
진시황제 죽기 1년 전 불길한 징조들이 자주 일어났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진나라에서는 이것은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그 유성이 땅에 닿았으나 타버리지 않고 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돌에 누군가가 진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고 새겨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극대노하여 범인 색출에 나서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자 그곳 주위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돌을 태워 버린다.
어느 것 50세의 나이에 접어든 진시황제는 전국을 시찰하던 중 폭염, 과로, 무리한 순행 일정에 지쳐 있었음에도 시찰을 강행하며 급격히 건강이 위독해지자 첫째 아들에게 수도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쓰지만 이 편지의 답장이 오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지 11년째 되는 해였다.
진시황의 사망설들
진시황제의 사망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던 시황제는 기관지염과 연골증을 앓아왔는데 왕이 된 후 일을 많이 하다 스트레스를 받아 간질 증상도 보였고 장거리 시찰에 간질이 발병해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사망설 수은을 불로의 영약이라 생각해 즐겨 마시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진시황제의 죽음으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신하들은 후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필요했고 수도 도착까지 진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기로 결정하고 수도로 돌아간다.
진시황 사후
진시황의 죽은 직후 간신배들은 똑똑한 첫째 아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진시황의 유언장을 측근 관리 이사, 조고 등이 조작을 한다. 조작된 유언장에는 첫째 아들의 자결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고 후계는 진시황의 18번째 아들 호해에게 넘긴다고 조작을 했고 첫째 아들은 이런 유언에 따라 자결하고 숨을 거두고 진시황제의 시신은 숨겨진 채 궁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동 중에 부패한 시신 냄새를 감추기 위해 썩은 생선 냄새로 시신의 악취를 덮었다.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은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 병마용갱 등등의 과도한 토목공사 진행으로 국가재정이 바닥이 났고 가혹한 세금까지 걷게 되자 백성들의 저항이 점점 심해지고 결국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고 시황제가 있던 그때 천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나 황제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왕의 자리에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려 했던 진시황제였지만 그가 죽고 3년도 안돼서 진나라는 멸망을 하게 된다.
진나라 멸망 이유
진시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시황제의 18번째 아들 호해(이세 황제)는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형제와 누이 20명을 숙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호해를 이용한 탐관오리 환관 '조고'가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이들의 부정부패로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지고 전국 곳곳에서 불만을 품은 백성들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결국 마지막 군주 자영은 자칭 옛 초나라의 패왕이라 칭하는 반란군 서초패왕 항우에게 항복하면서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는 멸망한다.
* 자영의 출생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시황제의 동생, 시황제의 손자, 호해의 형, 호해 형의 아들 등 여러설들이 난무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진시황제는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나 이를 지켜내지는 못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6회 리뷰 진행자: 조관희 교수님]
분서 갱유 사건과 만리장성으로 보는 진시황제의 폭정 이야기
진시황릉 병마용갱 (진시황 시신 부패를 막기 위해 이런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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