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2회]
오늘의 탐사지: 백인제 가옥 (영화 <암살> 촬영지)
주제: 친일파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영화배우 최희서
포스팅 내용
- 백인제 가옥 내부
- 한상룡
-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 의미
- 반민법 제정, 반민특위 출범
-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유
- 처벌된 친일파 몇명일까?
백인제 가옥
안채
이 집은 경제계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한상룡이 1906년~1913년 7년이 걸려 만들어진 집이다 (일제강점기).
한상룡은 이 집을 짓기 위해 1906년부터 주변 가옥 12채를 구입했는데 총 754평 =
였다.
한상룡
당시 한상룡은 한성은행 총무 자리에 있었는데 한상룡의 눈에 띈 친일파들의 나라 팔아 먹은 돈들이 있었다. 돈 냄새를 맡은 한상룡은 그 돈을 모아서 투자할 계획을 구상한 후 투자금의 10배의 수익률을 내며 초대박을 낸다. 이렇게 일제와 친일파의 신임을 얻어 한성 은행 은행장까지 된다. 일제에 충성해야 겠다고 결심하며 더불어 많은 일본 통감,총독 기념비 건립에 앞장 선다. 전쟁이 나자 연설을 한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를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광복 후 1947년에 사망했으나 그의 최후는 알려짐 바가 없다.
이 집은 처음에 친일파의 집으로 지어졌지만 그 후에 민족 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 손병희를 비롯하여 민족 언론인 최선익이 살던 곳이고 그 뒤 3.1운동에도 참여했던 독립 운동가이자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가 살았던 집이다.
백인제가 죽고 난 뒤 그의 부인이 쭉 살다가 최근에 서울시가 이 가옥을 매입했다고 한다. 지금은 백인제 가옥으로 불린다.
사랑채
사랑채 마당
사랑채내부
영화 <암살>의 촬영 장소로 나왔던 장소로 영화 속 강인국의 집에서 일본 고관들을 대접하는 장면에 나왔던 곳
암살 속 이경영이 연기했던 역할은 한상룡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로 이어지는 복도
안채 내부
영화 <암살> 마지막 장면의 의미
광복 이후에 미 소 군정 시기가 3년 동안 지속됐을 때 미 군정은 치안과 행정을 유지하기 위해 경험이 있던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한다. 미군정에게 친일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단지 치안.행정 유지를 위한 효과적인 방안만 필요했을 뿐 이였으므로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것은 미군정에겐 의미 없는 요구였다. 그래서 미군은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하면서 그들이 입지가 여전히 유지된다. 이렇게 등용된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에 친일에서 친미로 빠르게 갈아탄다.
반민법 제정(반민족 행위 처벌법)
그 후 1948년 8월 15일에 미 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으로 행정권이 이양이 되고 친일 세력 처벌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친일파 처벌을 위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반민법)을 광복 3년만에 1948년 9월 공포를 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일명 반민특위)가 출범
반민법을 바탕으로 조사할 사람들이 필요했으므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일명 반민특위)가 출범한다.
드디어 친일파 청산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고 친일파 680명을 조사하여 잡혀 들어간 친일파 청산 1호가 박흥식이였다.
친일파 박흥식
조선 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백화점 화신 백화점을 설립
박흥식은 일찍이 총독부와 결탁해 유통체계 구축을 도모하고 사업 수완이 뛰어 났던 성공한 친일 기업가였다. 1935년 어느 날 화신백화점에 큰 화재가 발생하고 이에 총독과 술자리를 마련한 박흥식은 맞은편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고
박흥식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전쟁 지원을 했는데 조선 비행기 공업(주)라는 회사를 설립해 비행기까지 헌납하고 대동아 전쟁 완수를 위해서 전력을 다하겠다고 충성도 맹세를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반민특위의 친일파 명단을 살펴보니 전부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행정 공무원부터 경찰 공무원까지 대부분 친일파였다. 이 사태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경찰들의 죄를 물어 모두 처벌한다면 지금 이 나라는 누가 지키냐며 이렇게 주변 친일파 인사들 때문인지 이승만 대통령 반민특위를 견제한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히려 친일파 검거에 박차를 가하고 친일 기업가 박흥식을 시작으로 최남선, 최린 등 친일파들을 줄줄이 검거한다.
우리나라 친일파 청산에 실패의 이유
반민특위 습격사건
그 중에 독립 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기로 유명했던 고문 경찰 노덕술이 체포되자 친일 경찰들이 술렁였다. 그 당시 고위 관료 대부분이 친일 경찰 출신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민특위 행보에 위협을 느낀 경찰들은 출근하는 반민특위소속 국회의원과, 조사관, 특경대 직원들을 한 명씩 납치해 폭행과 고문을 한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이 국회의원과 특경대를 납치한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점점 와해된다.
국회 프락치(스파이)사건
그 이후 제보가 들어온다. 국회에 스파이가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정당인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지시로 활동했다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제보로 국회에 심어져 있는 스파이를 잡아 들였는데 희안하게 대부분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이던 의원들이었다. 13명 검거된다. 이들은 고문으로 인한 허위 진술과 검증이 부족한 증거들로 결국 유죄 선고를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반민특위는 결국 해체 수순을 밟고 친일파 처단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렇다면 친일파 처단은 몇 명을 했을까?
처벌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친일파 대부분이 무죄나 형 집행 정지 또는 자격 정지와 같은 가벼운 선고로 끝나 결국은 제대로 된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반민특위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그래서 현실에서 처벌을 못하니 영화에서 처벌을 한 것이 <암살>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속 이정재 역할은 친일파를 모티브로 삼아 탄생한 친일 경찰 역할이었다.
"알면 그랬겠나 "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이승만은 국내 지지기반이 없어 그 상태에서는 정치 활동은 무리였기에 친일파들을 흡수한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항상 강조했던 것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였는데 친일파에게도 허용됐던 그의 말 자체는 비극이었다.
※ 밀정임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있는 상태가 있다. 밀정이 독립유공자로 둔갑 돼 수여받았던 건국 훈장은 추서되기도 힘들지만 받은 것을 박탈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훈장수여 당시 친일 여부 확인이 미흡했고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잡기도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며 결국 엉키고 꼬여버린 우리역사이다.
그러던 중 2000년 대에 공개된 밀정에 관한 일본자료를 통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 밀정들이 독립유공자 대상으로 선정된 기록이 발견되고 있다. 누가 영웅이고 누가 밀정인지 조차도 잘못 기록된 우리의 슬픈역사이다.
[선녀들 리턴즈 13회 중에서 발췌 ]
백인제 가옥을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관람 가능하다.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입장마감 17:30)
자유관람
관람시간내에 시설 외부 관람가능
(안채, 사랑채 등 시설내부 입장은 불가)
예약제(한국어 해설)
평일 4회
(10:00, 11:00, 14:00, 15:00)
주말 및 공휴일 5회
(10:00, 11:00, 14:00, 15:00, 16:00)
외국어 해설 안내
(16:00, 수요일-일본어, 목요일-중국어, 금요일-영어)
휴관일
1월 1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관람요금 : 무료
관람안내 문의전화
02-724-0232, 0200
선녀들 52회 1부 끝
☞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부] - 을사오적 정미칠적의 이완용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부] - 친일파 윤택영 윤덕영의 벽수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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