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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킬링필드 ! 폴 포트 동남아 최악의 학살자 최후,죽음까지 (46-3)

by 365 ^^ 2022. 5. 14.

1979년 베트남에서 공개한 취재영상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1만 4천여명의 사람들이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는데 이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은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비극의 극히 일부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불과 40년전의 일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킬링필드라 부른다.

 

 

폴 포트가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내용보기(46-2)

 

 

캄보디아 내전 /폴 포트 동남아 최악의 학살자 (46-2)

폴 포트 등장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며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이 등장한다. 폴 포트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단체의 지도자였으며 킬링필드를 주도한 동남아 역사상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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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의 시작 

 

1. 도시민의 강제이주

폴 포트가 프놈펜에 입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프놈펜 시민들을 쫓아냈다. 모든 도시민을 자본주의 자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국민을 두 종류로 나눴고 기본 인민이 폴 포트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민상이었다.

 

폴 포트의 국민 분류법

 

문제는 바로 도시민들인 신인민들이었다. 폴 포트는 신인민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사회를 망치는 국민이라고 생각했고 신인민을 향해 했던 말이 있다. 

 

 

강제이주를 위한 묘안
그리고 크메르루주 프놈펜 입성 24시간 내로 시민들을 다 농촌으로 내쫓기로 결정한 것이다. 250만에 달하는 시민들을 한꺼번에 내쫓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고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폴 포트는 묘안으로 프놈펜을 미국이 폭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를 퍼트렸고 무력으로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환자, 노인, 아이, 임산부 할 것 없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을 했다.

 

 

한때 동남아의 파리로 불린 도시는 하루아침에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한 나라의 수도가 텅 비어버리는 초유의 사태였다. 도시에서 쫓겨난 시민들은 크메르루주 군인들의 감시 속에 강제 이주당했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걸어야 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각종 질병까지 사람들을 덮쳤다. 1975년 4월  17일 강제 이주로 무려 1만여 명이 사망했다. 

 

2. 집단농장
강제 이주는 프놈펜은 물론 여러 도시에서 시행됐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은 집단농장으로 이주하게 된다. 집단 농장은 거대한 강제 수용소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집단 농장 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의 쌀 생산량을 3배로 늘리겠다고 선포하면서 하루 종일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노동에 시달린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수확량은 늘지 않았다. 이에 감독관들은 목표량 미달성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 보고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 간부들은 보고해야 하는 사망자 수를 축소해 쌀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축소해 보고한 사망자의 배급 물자를 빼돌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고된 노동을 했지만 수확물을 받지 못한 국민들이었다. 그래서 집단 농장에서 과로, 질병, 영양실조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975년 한 해 동안 도시 이주민의 1/3이 사망했다. 

 

 


 

3.사상 교육 소년병 양성 
1976년 말 대부분 농촌 지역의 식량 부족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한 폴 포트였고 본인의 계획이 성공하리라 확신했었다. 폴 포트의 이런 망상에 희샹양이 된 것은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자본주의를 가르친다며 전국의 학교를 폐교시킨 폴 포트였다. 또한 부모와 아이들이 같이 지낼수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을 모두 모아서 극단적인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게 했고 특히 5~9세까지 집중적으로 사상 교육을 시켰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에 집단 농장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무기를 든 소년병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몸만한 총을 들고 소년병이 되어버린 어린아이들

 

폴 포트의 광기 어린 대학살
이 가운데 폴포트는 순수한 농민을 빼고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는 극단적인 정책을 시행한다. 폴 포트의 척살 대상은 지식인이었다. 대표적인 지식인은 교사, 공무원, 경찰을 모두 죽이려했고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은 교육받은 사실을 숨겨야했다. 

 

그래서 크메르루주는 지식인을 안경을 쓴 사람, 피부가 곱고 밝은 사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색출했다. 또한 가수, 운동선수, 예술인등도 모두 색출의 대상이었다. 폴 포트가 사람을 죽이는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색출한 사람뿐만 아니라 온 가족 3대까지 살해했다.  폴 포트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이유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반항할 수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1975~1979년 사이에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들이다. 


 

킬링필드 현장

투올 슬랭 강제수용소 
그리고 그 중에 살려둔 사람들이 있었다. 반혁명 사상을 가진 사람과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들이었고 오직 폴 포트 본인의 기준으로 색출했고 크메르루주 경찰들이 이들을 투올 슬랭 강제수용소였다.  현재는 이곳은 학교로 운영되던 곳이였는데 강제 수용소로 개조해 운영하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약 1만 4천 명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내 강제 수용소를 무려 120여곳이나 세웠다. 말 그대로 감옥 국가를 건설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가 수도 프놈펜에 있는 투올 슬랭 수용소였다.  폴 포트는 이들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신체의 자유를 뺏긴 채 밤에는 허락 없이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곳에서 최고의 고통을 주는 다양한 끔직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단 한명의 미치광이 독재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살육당했던 것이다. 

당시 교도소장의 증언을 들어보면

 

 

 

투올 슬렝 강제 수용소 그곳에서 무슨일이 .. (킬링필드 현장)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현장 투올 슬랭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고문이 자행되었나? * 킬링필드는 1975~79년 사이에 폴 포트 정권인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학살되어 수천명이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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쯩아익 매장지
이렇게 수용소에 수용된 인원만 1만 4천명이고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암매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프놈펜 외곽에 있는 쯩아익 매장지이다.

 

 

이곳에서 약 1만여구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세상은 큰 충격에 빠졌다. 쯩아익과 같은 집단 매장지는 전국적으로 약 2만여개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폴 포트 집권 약 3년 9개월 만에 캄포디아 전체인구의 1/4이 사망했다.  글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킬링필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바척마을 학살 사건
또한 폴 포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때 중국인 태국인 베트남인도 학살을 했다.  또한 수백년 전 캄보디아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베트남을 자주 침범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바척마을 학살이 있다.

 


크메르루주 군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마을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 이렇게 12일 동안 약 3천여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학살당했다.  

 

베트남 캄보디아 침공

바척마을 사건으로 크게 분노한 베트남은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당시 베트남은 미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군사력인 부쩍 강해져있었고 약 한달만에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고 후에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지금의 초대 총리로 훈센 과 헹 삼린 대통령이 정권을 잡게 된다.

 

둘다 크메르루주 소속이었으나 이들의 정책에 반대해 베트남으로 망명했던 정치인들이다.

 

또 다시 캄보디아 내전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폴 포트는 태국 국경 근처까지 도망가게 되고 그 근처에서 게릴라군을 창설하고 친 베트남 정부와 내전을 벌이게 된다. 이 캄보디아 내전 중에 사망자도 수십만명에 이른다. 이때도 중국이 크메르루주에게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당시 베트남과 영토분쟁이 있어서 중국과 베트남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약 1000년간 중국이 베트남을 지배했었기 때문에 결국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된다. 

과거 폴 포트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반미 정책을 이용했는데 이런 폴 포트를 미국이 지원을 했다. 게다가 또다시 폴 포트는 시아누크 왕을 지도자로 내세워 전쟁 명분을 만들었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몰래 받은 크메르루주와 친베트남 정권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의 크메르루주 지원
이 시기에 미국은 점점 심해지던 내전에도 불구하고 크메르루주만 정식 정부로 인정했고 친베트남 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철저히 무시했다. 게다가 미국은 베트남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국제적인 여론전을 펼쳐 베트남이 무력으로 캄보디아를 침략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비난에 베트남은 국제적으로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킬링필드를 알린 베트남
이에 여론을 뒤집기 위해 베트남은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국에 홍보하게 되고 베트남에 의해 최악의 강제 수용소 투올 슬렝이 박물관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프놈펜 외곽에 다른 킬링필드를 찾아내서 발굴하기 시작하고 베트남의 지원으로 캄보디아 전역을 다니며 기자들이 취재하게 되고 이를 통해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이다.

 


베트남 철수
베트남에 의해 캄보디아 내 킬링필드 대부분의 유골을 발굴되었고 소문만 무성했던 크메르루주의 집단학살이 처음으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베트남의 홍보 효과는 적절한 타이밍으로 캄보디아의 비극을 알렸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베트남은 전쟁 10년만에 캄보디아를 철수해야했다.   

 

캄보디아 입헌군주제 부활
그리고  UN에서 크메르루즈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이들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1993년 UN의 적극적 개입으로 크메르루주가 빠진 채 총선이 이뤄지고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부활이 되었고 시아누크가 다시 국왕으로 복위되었다. 하지만 폴 포트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부에 맞서 다시 내전을 시작하게 된다.  

 

 

폴 포트의 최후

오래된 내전으로 크메르루주도 분열되기 시작했고 폴 포트를 버리고 크메르루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1997년 부하들에게 체포된 후 인민재판을 받은 폴 포트는 종신형을 선고으로 가택연금 중 1년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두고 음모론이나 독살론등이 난무했다. 폴 포트의 시신은 쓰레기와 함께 화장되었다.  폴 포트가 사망한 후에 코메르루주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킬링필드 추모의 날 
폴 포트는 사망 전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본 캄보디아 사람들은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최악의 지도자 한명이 가져온 최악의 비극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매년 5월 20일은 킬링필드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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