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년 고구려 요동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북연의 황제 북풍이 고구려 장수에게 참수를 당한 것이다. 심지어 황제의 10여명의 아들까지도 무참히 살해 당했던 믿을 수 없던 사건이었다. 고구려당에서 최후를 맞은 배후에는 광개토 대왕의 아들이자 고구려 제 20대 왕 장수왕이 있었다.
장수왕의 재위기간은 79년 2개월로 장수왕을 알렉산드로 대왕과 비교를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대왕은 본인이 죽자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장수왕은 후대에 더 큰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그것은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능력 덕분이었다. 약 80 년의 제의 기간 동안 중국과의 전쟁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장수왕의 외교덕분이었던 것이다.
시대적 배경
서기 438년 장수왕 44세에 일어난 사건이다. 고구려 요동 일대에서 당시 5호 16국 시대로 북위라는 나라에 서서히 통일이 되어가던 시기였다. 북위 밑에 송나라(고려시대 있던 송나라 아님) 가 있었다. 두 송나라의 구별하기 위해 고대 송나라의 건국자 유유의 성씨를 붙여 이 송나라를 유송이라고 불렀다. 중국 북쪽에는 선비쪽이 세운 북위가 있었고 남쪽에는 한족인 송나라가 있었고 중국대륙이 남북으로 나뉘어소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장수왕에게 참수당한 황제는 북연이라는 나라의 황제로 한때 요서와 일부 화북지역을 차지한 나라로 꽤 강한 나라였다. 북연의 앞선 나라가 후연이고 그 앞이 전연이 있었다. 광개토대왕 시기 후연과 고구려는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화북을 통일하고자 하는 북위에 밀리면서 북연은 세력이 약해졌다.
사건의 발단은 장수왕에게 보내진 2개의 외교문서였다. 하나는 435년 북연의 풍홍이 다른 하나는 436년 북위 황제가 은밀히 문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고구려와 북연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당시 북연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위치해 고구려를 북위의 공격을 막아주는 완충역할을 했던 나라였다. 오늘날에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비슷한 양상이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으로 러시아는 완충지를 잃어버리게 되어 전쟁까지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 북위가 보낸 문서의 내용은 북연을 칠테니 고구려는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고 볼수 있다. 북위는 그렇게 북연을 공격하고 수도 화룡성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이렇게 북위에 의해 북연이 몰락하던 순간 화룡성 맞은 편에서 북소리가 들렸고 장수왕이 보낸 수만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갑작스런 고구려의 등장에 북위는 당황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재빠르게 화룡성을 들어가 북위보다 먼저 성을 장악한다. 그리고 북연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고구려군은 성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북연의 황제와 백성들을 데리고 고구려 요동으로 향한다.
이런 고구려의 위세에 북연은 지켜볼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재화와 사람은 고구려가 취하고 북위에게는 영토만 넘겨준 셈이 되어서 마땅히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실속은 취하면서 전쟁은 취하는 교묘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주시킨 북연의 주민들을 요동에 안치시키고 그들의 역량을 이용해 요동개발에 투입시켰다.
북위 황제는 고구려 출병 소식에 분노했고 북연의 황제를 잡아오라고 사신에게 명령했다. 이때 장수왕은 북위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다.
“마땅히 풍홍과 함께 (위나라) 임금의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 결론은 풍홍을 내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외교적 수사의 절정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예의를 갖추되 핵심은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외교적 수사이다. 이에 고구려와 전쟁을 감행하려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장수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파악한 후 모든 계산을 마치고 출병을 감행했던 것이다.
장수왕 중국 황제 참수사건
북연 황제 풍홍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탈출 후 고구려 요동에 도착한다. 이때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북연의 황제 풍홍을 용성왕 풍홍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한낱 지역의 왕으로 낮춰 부른 장수왕을 인해 분노한 북연의 풍홍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송나라에 망명 요청으로 한다. 패망한 북연의 황제를 둘러싸고 얽힌 송, 북연, 고구려 세나라였다.
송나라 입장에서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북연 황제를 데려가기 위해 송나라는 고구려로 군대를 보냈다. 풍홍은 송나라 군대를 만나기 위해 가족과 백성을 이끌로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갑자기 먼 곳에서 고구려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고 장수왕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 기마병들은 자비없이 풍홍을 참수한 것은 물론 일가족 모두를 참수시켰다. 장수왕 입장에서 풍홍을 절대 용서할수 없었던 것이다. 장수왕의 외교적 전략에 풍홍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화근을 잘라버린 결단이었다.
장수왕의 균형 외교
이를 지켜봤던 송나라 장수는 고구려 장수를 죽였고 이에 장수왕은 여기서 다시한번 외교적 딜레마에 빠졌다. 송을 공격하면 전쟁 위기에 놓이게 되고 송과 고구려의 전쟁은 북위에만 좋은 일이 되는 것이고 참고 넘어가기에는 고구려의 위신문제와 국내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장수왕은 붙잡은 송나라 장수를 돌려보내면서 송 장수가 독단적으로 송 황제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일을 행하였으므로 송에게 문제를 처리할 것을 종용한다. 이제 판단은 송나라의 몫이었다. 이것은 송과의 국제 갈등은 피하되 스스로 처벌하게끔 만든 장수왕의 판단이었다.
송나라는 일단 장수를 감옥에 가둔 후 나중에 풀어줬다. 이는 외교적인 합의를 본것이다. 장수왕은 균형적인 외교를 통해 일을 해결했다고 볼수 있다.
장수왕의 등거리 외교
이 사건 이후 고구려는 송과의 외교에 주력한다. 강국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송의 북벌 시도에 말 800필을 지원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북위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안니하고 각 나라에 같은 비중을 두면서 중립을 지향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행했었다.
당시 북위와 송나라에 비해 국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수왕의 외교 전략을 통해 어떻게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의 위상과 위치를 명확히 했던 장수왕이었다. 장수왕은 약 80년 재위기간 동안 큰 문제없이 중국과의 평화를 지켰다. 장수왕 이후 약 200년 간은 중국과 고구려의 평화적 외교속에 중국대륙은 그들끼리 싸우는 모습들이 유지되었다. 북위는 장수왕 재위 기간동안 황제가 다섯 번이 바뀌고 남조는 동진-송-남제로 두 번의 왕조가 교체되었다. 격동의 5세기를 고구려 장수왕만이 홀로 지켜나가면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굳건한 기반을 마련했던 장수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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