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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 대립->사라예보 사건 [제 1차 세계대전 1-1]

by 짱신나^^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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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 상명대 류한수 교수 강의 ]

 

포스팅 내용

  •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의 상황
  • 연합국 동맹국의 형성과정
  • 사라예보 사건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등의 공국으로 갈라졌던 독일은 1871년 1월 독일제국을 성립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약 40년 전 독일은 정치적 앙숙인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와 독일의 3대 황제 빌헬름2세가 대립각을 이루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인 국가들의 통일을 주도해서 1871년 독일 제국을 세우는 주역으로 군비 확장 없이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철혈정책을 펴서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독일의 국력을 위해 적극적인 군사력 증강과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다.

 

 

 

이 두사람의 외교정책 차이가 훗날의 사라예보 총성을 만들어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독일의 주변으로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바다건너 영국, 동쪽에서는 러시아가 있었는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는 왜 대립하게 됐는가? 

 

독일 제국 통일 당시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 주변국과 정면 충돌은 피하고 국가의 내실을 다지자” 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당시 73세) 와 빌헬름 2세(당시 29세) 의 나이차가 44 세) 빌헬름 2세가 황제로 등극하고 빌헬름 2세는 ‘강대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고 했고 독일의 국력을 더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내실을 다지자는 비스마르크와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자는 빌헬럼2세는 대립하게 되고 이에 결국 비스마르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빌헬름2세의 식민지 개척 정책 실시

그러나 이 비스마르크의 사직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 왔다. 이제 본인 뜻대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 빌헬름2세는 영국과 프랑스가 많은 식민지를 선점한것 처럼  해외 식민지 개척을 얻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독일도 적극적인 해외 팽창정책을 펼친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독일과 러시아 동맹 파기

독일은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거부하고 전쟁 시 중립을 약속했던 독일과 러시아 동맹관계에 대한 연장을 파기한 독일은 새로운 외교노선을 구축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반면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랜 갈등 관계였으나 두 나라를 조정하던 독일과의 동맹이 소멸되자 새로운 동맹이 필요했다.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원수지간인 프랑스와 새로운 동맹관계를 맺는다. 결국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이 독일의 견제를 받게된 독일이었다.

 

 

독일의 해군 증강

당시 세계 정세의 중심이었던 영국은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바다를 사수하기 위한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패권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해군력 증강에 힘을 썻고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서 독일 해군을 강력하게 키우기 시작한다.

 

당시 만들어진 전함들 가운데 하나인 ‘카이저 빌헬름 2세’ 함

 

영국과 프랑스 동맹 결성

이에 가장 공포심을 느낀 나라는 영국이었고 영국과 독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결성한다. 이렇게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동맹관계를 형성한다.

 

프랑스가 차지하려던 아프리카 북쪽에 모로코라는 나라가 있는데  모로코에 방문해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린 빌헬름 2세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사이가 더욱 안좋아진다.

 

 

독일 패권에 확장을 위해 독일 베를린~터키 비잔티움을 이어주는 철도 건설을 하고 이에 독일의 세력이 동유럽에서 중동까지 확장에 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 동맹 

여기에 해외 식민지의 확대와 유지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패권국이 된 영국이 가장 견제를 했던 것이다. 패권국에 대한 독일의 도전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사이와 멀어지고 결국 열강 사이에 고립된 독일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체결한다.

 

 

 

사라예보 사건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긴장 상태 속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국빈 방문한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는 오픈카를 타고 등장하고 이때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대공부부를 저격한다.  이 청년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된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를 뒤흔든 사라예보의 총성 사건이다.  대공부부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다.

 

 

이로인해 오스트리아는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대공을 쏜 인물은 가브릴로 프린치프로 당시 19세 였는데 세르비아 ‘검은 손’ 비밀 조직 요원이었다. 검은 손 비밀 조직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통합 독립 하는 것을 오스트리아 제국이 반대 한다고 여겨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를 암살 계획을 실행한다.

 

 

제위계승 제 1후보자였던 오스트리아 부부가 총에 맞으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발칵 뒤집히지만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같은 슬라브계 민족으로 러시아는 슬라브민족의 맏형으로 생각했기에 세르비아를 건드리면 러시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섣불리 전쟁 선포를 하지못하고 화를 참게 된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제국 지원 

이때 독일이 나타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무조건적으로 지원을 하겠다고 제한을 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에 불을 지핀 독일이었다.

 

 

열강들의 선전포고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은 행동 계시에 나선다. 그래서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때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해서 오스트리아로 가고 독일은 이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러시아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독일에 군대를 동원하니 독일이 프랑스에 또 선전포고를 한다.

 

프랑스를 공격할때 중립국이였던 벨기에를 거쳐서 가면 영국이 국제협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 또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 영국과 사이가 안 좋았던 나라 오스만 제국이 (당시 영국에 전함 사기를 당했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독일과 한편이 되어 러시아를 공격한다. 다른 또 한 나라는 세르비아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원래 국경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전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 1세계대전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오스트리아 대공부부의 피살이었지만 전체 유럽국가들이 참여하는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고 이해 관계가 얽힌 수많은 국가들이 대륙을 넘나드는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독일은 전쟁을 대비해서 미리 계획을 세워놨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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