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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1차 세계대전 참호전, 전쟁 참상 (베르됭 전투, 솜 전투) [1-3]

by 짱신나^^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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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독일의 슐리펜 계획

 

[22-3]

 

초기 1차 세계 대전 분위기

초기 전쟁에 휩싸인 유럽의 분위기는 프랑스는 전쟁이 일찍 끝날 거라 예상을 하고 처음에는 군악대에  퍼레이드까지 하면서 전쟁을 참여했고, 독일 또한 드디어 전쟁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쟁을 기대했고 기차역에서 부모들이 자식을 웃으면서 보낼 정도로 분위기는 축제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독일의 슐레핀 계획이 실패한 이후 서부전선이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옥같은 전투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갈수록 병력이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18세부터 41세까지 남성을 징집하는 1916년 영국 최초의 징병제가 실시된다.

 

 

참호전

마른전투에서 패한 독일은 퇴각하면서 독일은 더이상의 후퇴를 막기 위해  참호를 만들었다. 참호의 등장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는다. 

 

보통 성인 남성의 키는 약 160~180cm이니 안전한 참호의 깊이 2m 정도 참호 를 팠고 참호 앞에는 적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방어물인 말뚝에 맨 철조망 배치했다.  

 

적군이 방어선을 뚫고 참호에 진입할 것을 대비해 참호를 복잡한 미로처럼 설계했다. 적군이 참호에서 길을 잃게 할 목적으로 좁고 구불구불하게 설계했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병사들이 쉴 수 있는 대피호까지 만들어 놓게 된다.

 

점점 체계적으로 구축된 대규모 참호에 의지해서 동맹국과 연합국은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로 인해 교착 상태에 이르며 장기화된 전쟁이었다.

 

참호의 규모

이때 참호의 규모가 북해에서 시작해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의 길이가 760km였다. 

 

직선거리로 서울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이어진 거리이다. 
현재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는 참호로 항공사진으로 찍어보면 선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참호의 흔적이 있다.

 

위생 문제

기관총과 대포를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들어갔으나 그러나 참호안도 안전하지는 않았다.제 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10월 25일부터 본격적으로 참호를 파기 시작해서 1915년 3월 10일까지 비가 안 온날이 겨우 18일이었다.

 

 

계속해서 내린 비에 발목까지 물이 보통 30cm는 물이 차 있었고 병사들은 발목이 늘 젖어 있는 상태로 물이 차오르게 되면 가슴까지 겨드랑이까지 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물을 피해 머리를 내밀면 적의 저격에 사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진흙탕에서 생활했던 병사들이었다.

 

이런 빗물속에서 계속해서 생활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물에 젖은 옷 무게만 15kg이나 되었고 빗물과 함께 참호안으로 차 올랐던 오물이 역류해 위생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또한 시체냄새를 덮는 용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고,  그 보다 더 큼찍했던 것은 시체를 먹고 토실토실해진 강아지만한 쥐떼들이였다.

 

참호안에 물이 차면 쥐떼가 헤엄을 치고 돌아다니고 자고 있는 군인들을 시체로 착각해 공격하기도 해서 쥐에 물려 창처가 날 경우 감염 위험이 있기 때문에 쥐에게서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인이 달린 마스크를 쓰고 잠을 자기도 했다.

쥐 뿐만 아니라 각종 벌레, 해충도 들끓고 손목, 어깨, 팔뚝등 온몸에 파리떼가 드글거렸다. 
머릿니가 두피안까지 파고들어 병사들이 삭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참호발이였는데 더러운 물에 젖은 군화를 벗지도 못한 채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비위생적인 생활 때문에 생긴 병으로 처음에는 발의 신경이 마비되고 검푸르게 변해서 발이 섞기 때문에 발을 절단하게 되는 것이다. 참호발에 희생된 병사들이 셀수 없이 많았다. 

 

1914년 ~1918년 서부전선에서 전사한 병사 수만 약 269만 명이었고 질병으로 죽어간 군인이 약 352만 명이었다.

 

 

 

 

베르됭 전투 (1916.2~1916.12)

1차 대전 중 최악의 전투로 꼽히는 전투가 바로 베르됭 전투인데 베르됭은 오랜세월 동안 프랑스의 핵심 요새지대로 1870년 프랑스 vs 프로이센 전쟁(보불 전쟁)시 프랑스가 패전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지키면서 저항했던 곳이 베르됭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곳이다.

 

 

당시 베르됭이 주요 전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력과 무기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 방어가 허술한 상태였었는데 독일이 이를 캐치하고 베르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목표를 세운다. 독일은 베르됭 지역에 병력을 집결하고 베르됭을 탈환하려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퍼붓는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랑스 군을 모두 죽이는 일명 ‘사형터 작전’ 을 펼쳤고 프랑스군도 이에 맞서 격렬하게 대응한다. 결국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변환 베르됭 전투였던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한 군사의 일기는 이 뒤로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 일기를 마지막으로 장교를 생을 마감한다.

 

 

지옥같은 전쟁 모습

포격속에서 지옥을 맛보게 되는 병사들은 포탄의 파편이 튀어 배를 다치게 되면 창자가 쏟아져 자신의 배에 나온 창자를 손으로 움켜쥐고 쇼크사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머리에 포탄을 맞아 두개골 없이 살아 있는 병사의 모습들이 10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베르됭 전투 사상자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 사상사는 약 37만명이 넘었고 , 독일 군도 약 33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낳은 전투를 프랑스군이 이 참혹한 전투를 빗대어 ‘고기 분쇄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곳에 여전히 터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불발탄만 약 1500만 발이고 (전투에 사용된 포탄 중 약 25%가 불발된 것으로 추정) 전투 첫날에만 약 10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은 엄청난 소모전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부 지역은 불발탄으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솜 전투

베르됭 전투에 이은 최악의 소모전인 최대 살육전 솜 전투에서는 독일의 기관총으로 전쟁 첫날에만 영국군 사상자가 약 6만명이었고 이에 영국이 탱크로 대응하면서 1초당 8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영국군이 전진한 거리는 100m도 되지 않았다. 처음 솜 전투에서 투입된 인원은 약 800명 정도였으나 돌아온 인원은 약 25명이었다.  온갖 신무기들이 난무했던 솜 전투였다. 

 

솜이라는 강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해서 솜 전투이다. 약 4개월간 지속된 솜 전투 최종 사상자는 약 100만명이 발생했다.

 

 

독가스 사용 (염소가스)

그러나 전쟁무기보다 더욱 무서웠던 것이 바로 독가스였다. 1915년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염소가스라는 독가스를 사용했다. 파인애플과 후추를 섞은 냄새로 독가스를 맡으면 호흡이 가빠지고 입술이 자줏빛으로 변하고 낫빛이 잿빛으로 변한 뒤 쓰러져 시름시름앓다가 사망한다. 이후에 독가스를 막기 위한 방독면이 만들어지고 그 숫자가 2700만여개가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허술에보였다가 점점 발전하게 되는 방독면 모습이다. 
군수물자 운송에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말에게도 방독면을 씌웠다. 1917년부터 독가스를 필터로 걸러내고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표준 방독면을 사용하게 되었다  .

포스켄 독가스

이에 각 나라는 더 강력하고 더 고통스러운들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1915년 말에는 영국에서 개발 된 포스켄 가스가 등장하는데 포스겐을 마시면 폐가 녹아 내려서 찢어지고 산소 부족으로 몇 시간 안에 질식사하게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바람을 이용해 독가스를 살포하는 모습

 

겨자가스

그러나 이보다 더 약명높은 독가스는 바로 겨자 가스였다. 겨자 가스를 흡입하면 열두시간이내 지독한 고통이 시작되고 피부 안팎으로 살이 썩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겨자색 물집가 함께 기관지 점막이 벗겨지고 심지어 시력까지 상실하게 된다. 

 

겨자가스에 의해 시력을 잃은 병사들이 서로의 어깨를 짚고 움직이는 모습

 

이렇게 1 차 세계 대전 동안 독가스로 사망한 사망자는 10만 명에 이르고 부상을 당한 자는 약 130만 명이다. 이후에 독가스의 참혹함을 막기 위해서 1925년에 제네바 협약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 1928년 2월 8일 발효되었다.

 

전쟁 휴유증 쉘 쇼크(Shell Shock) 

전쟁의 휴유증은 병사들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Shell Shock 이라는 휴유증을 앓게된다. 포탄의 충격, 전쟁에참전하며 정신도 피폐해진 상황으로 정신이 무너져버린 것으로 병사들은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병으로 심한 경우에는 일상생활도 불가능한 병이다.

 

 

소모전이 남긴 또 하나의 트라우마는 가족들의 트라우마였다. 이 당시 부대를 구성할때 같은 고향 출신으로 부대를 편성하게 되고 그 부대가 전투에 투입될 경우 한날 한시에 한 동네 청년들의 몰살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 가족이 충격에서 이런 비극은 지역 저체가 겪는 일이었고 참전국 모두 겪는 일이었다.

 

[22-4]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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