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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1차 십자군 원정 : 마라 대학살, 롱기누스 창, (탬플, 튜턴, 성요한) 기사단 탄생 .. 133-1

by 365 ^^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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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최초의 근원지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있는 곳으로 평화로운 공존은 중세시대부터 깨지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니다!? (예루살렘 성지 3곳, 분쟁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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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우던 셀주크 튀르크족은 예루살렘을 장악 후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막아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닌 셀주크 튀르크족은 동방교회 중심이자 비잔티움 제국까지 침범한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한다. 

 

 

 

자칫하면 서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도 위험해질수 있어 이를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받아들인다. 교황은 또한 이 기회를 통해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싶었다.  교황은 기독교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그만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물리쳐야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클레르몽 공의회 

이에 교황은 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가톨릭 교회 회의를 열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연설.

 

사람들은 교황의 연설에 신의 중요한 땅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귀족부터 평민까지 한마음으로 데우스 로 불트(=신이 그것을 원한다) 을 외쳤고 이 글씨는 로마의 4대 성당 중 하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거룩한 문에 여전히 남아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데우스 로 불트(=신이 그것을 원한다) 

 

아직 증서는 없지만 교황은 벌의 면제를 약속했고 십자군으로 명예롭게 죽는다면 하늘에서 불멸의 보상과 구원이 있을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십자군에 참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은자 피에르 선교사가 유럽을 돌면서 십자군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그가 혼자 모은 십자군 인원만 해도 약 1만 명 이상이엇다. 

 

제 1차 십자군 원정 

민중 십자군

1096년 제 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성지를 되찾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1차 원정길에 나선 최초의 십자군은 약 10만여 명정도 되었다. 

 

1차 십자군 모습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

 

이들 중 절반이상이 군사 훈련도 받아본적이 없는 민중 십자군이었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무장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위치를 몰라서 그저 앞사람만 따라갔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은 워낙 행색이 거지같아서 십자군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비잔티움 제국 황제는 배를 이용해 이들을 빨리 전쟁에 내보내야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들은 모두 몰살당하거나 일부는 항복해서 노예로 팔려갔다. 

 

 

 

정규 십자군

민중 십자군이 성지 탈환에 실패했을 무렵 본격적으로 무기와 장비를 갖춘 또다른 십자군들이 출정을 마쳤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정규 십자군은 동물의 가죽이나 뿔 또는 금속으로 된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다소 둔탁하지만 적의 칼에 잘 베이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십자군의 수는 약 6만 여명이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정규 십자군을 보고 불안감을 안게 된다.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까봐 걱정해 정규 십자군과 한 가지 협약을 맺게 된다. 자신들이 군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얻게 되는 땅은 비잔티움 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였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한다. 

 

 

 

정규 십자군은 니케아를 7주간 공격한 끝에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점령 바로 직전에 성벽에 먼저 깃발을 꽂은 비잔티움 제국이다.  그때부터 십자군들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성지 예루살렘 탈환보다 전리품을 챙기려는 영토 싸움으로 변질 된 것이다. 그래서 십자군이 처음 내밀었던 명분과는 전혀 다른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타티카 성벽

 

현재 튀르키예 안타티카라고 불리는 안티오키아는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10m 가 넘는 커다란 성벽에 400여 개의 망루로 둘러싸여 있어 철통방어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십자군의 만행

안티오키아 대학살 

8개월간의 공격에도 십자군은 아티오키아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십자군은 점점 지쳐갔다. 이에 성안의 사람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한 후 성안으로 들어갔다. 8개월간 제대로 목지 못해 굶주렸던 십자군들은 땅과 보물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학살해 버렸다. 

 

안티오키아 대학살 1877

 

안타까웠던 것은 이슬람교도뿐만 아니라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마져 살해했던것이다.  땅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학살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점령한 다음날 이슬람의 지원군이 안티오키아를 둘러쌌다. 그래서 거꾸로 십자군들은 성안에 갖히게 된 것이다. 8개월간의 공방으로 이미 성안에는 식량이 바닥 나있었다.  

 

롱기누스의 창 발견 

그런데 이들은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짜른 롱기누스의 창으로 성스러운 성물로 여기는 것이다.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짜른 롱기누스의 창

 

이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하면 세계를 정복할수 있다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또한 이 창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빈을 침공했을 당시 롱기누스의 창을 가져왔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롱기누스의 창은 현재는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호프부르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롱기누스의 창

 

이렇게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한 십자군은 신의 가호를 믿으며 사기가 올라갔고 극적으로 힘을 얻은 십자군은 이슬람군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의 기병대를 앞세워 뛰쳐나가 이슬람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여전히 식량문제가 남아있었다.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자 도둑질까지 하기 시작한다. 

 

마라 대학살 

이들은 안키오키아를 나와서 닥치는 대로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중이었고 그러던 중 1098년 12월 십자군은 당시 '마라' 라 불린 한 마을을 발견한다.  십자군은 이곳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마라인의 시신을 훼손해 인육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십자군 사이의 소문에 의햐면 이슬람교도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금화를 삼킨다고 해서 이들의 시신을 톱으로 잘랐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그리고 십자군들은 이런 행동이 신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이곳에서 20여일 머물며 약 8천여 명에서 2만 여 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1099년 6월 십자군은 출정 3년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다시한번 신의 아름을 앞세워 이슬람인을 잔혹하게 학살한다.  이때 이슬람 측 기록은 7만명, 십자군 기록은 1만명 정도가 학살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 

 

성 십자가 발견

이때 십자군은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이들은 성 십자가를 들고 항상 전장에 나갔다고 한다. 

성 십자가 .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은 땅을 약탈하는 것으로 끝이났다. 일부 십자군들의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은 예루살렘과 일대의 지형을 변화시켰다. 이들은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에 각각의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십자군이 탈환한 예루살렘에도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십자군 기사단의 종류 

이후 엄청난 사람들이 순례객들과 함께 몰려들게 되었고 3만명 거주하는 대도시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민들과 순례자를 위협하는 강도떼가 몰려들었고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군들은 십자군 기사단을 만들었다.  

 

십자군 기사단의 모습
템플 기사단

 

빨간 십자가의 템플 기사단은 성전 기사단이라고 부르는데 예루살렘의 순례객을 지키는 대표 기사단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가 적들이 쳐들어오면 싸움을 했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강인함과 깊은 신앙심을 가진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재산을 보호해주는 어음을 만들어 유럽 금융업의 기반을 다졌다. 

 

튜턴 기사단

 

검은 십자가는 독일의 기부단체가 중심이 되는 튜턴 기사단으로 수도자들로 구성되어 이교도를 색출하고 예루살렘을 지켰다. 

 

성요한 기사단 : 검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를 새겨놓았다.

 

가장 먼저 생겼던 기사단으로 로마 가톨릭계의 기사단이다.  이들은 치료를 목적으로 창설된 기사단으로 치료를 위해 순례 온 사람들이나 순례 중 다친 사람들을 치료했다. 한때는 연간 약 2천 명까지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기사단의 수호 아래 예루살렘은 기독교만의 성지임을 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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