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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히틀러는 왜 소련을 공격했나? (독소 불가침 조약 파기 이유 )

by 365 ^^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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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이탈리아,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과 싸운 전쟁이다. 그리고 연합국에 결정적 승리를 기여했던 나라가 소련이다. 독소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일부지만 가장 핵심 전쟁으로 독소전쟁을 이해해야 20세기를 이해할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군인 사망숫자를 살펴보면 소련 군인의 사망자만 1000만이 넘는다. 이는 당시 한반도 인구의 약 1/3수준이다. 

 

스탈린 성격
동물농장(1945) 영국 작가 조지오웰의 풍자소설로 소설에 나오는 돼지는 스탈린을 상징한다. 스탈린은 원칙주의자적인 모습이 있다. 예를 들어 독소 전쟁에서 스탈린의 장남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지만 포로교환을 거절하고 스탈린의 장남은 사망한다. 스탈린은 대한민국 역사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고 20 세기 냉전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원래 스탈린과 히틀러는 사이가 나쁘지가 않았다.

히틀러는 왜 소련을 공격했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를 제압해야 되는 상황에서 일단 등 뒤가 안전해야 되기 때문에 소련과 협상을 맺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나치즘 확산을 막기 위해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맞지 않는 먼 이념 차이로 인해 이념의 틈을 잘 파고든 히틀러였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 조약은 2년도 유지되지 못한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3시 30분 평화로웠던 소련 국경지대에 독일 전투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히틀러의 이념 
히틀러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종주의이다. 인간은 여러 인종으로 구분 되어있고 인종 사이에 유전적 우열이 있다고 믿고 지배-피지배를 합리화 하는 사고 방식이다. 그 중에 아리아인 독일인이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고 믿었으며 최종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인종은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이 있었는데 소련은 슬라브인으로 많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쟁으로 슬라브인의 땅인 소련을 독일인의 생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독일의 전쟁 방식은 절멸 전쟁으로 박멸, 절멸, 박멸 을 의미하는 것으로 히틀러에게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사람이 아닌 해충에 가까웠다. 히틀러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해롭다고 생각해 씨를 말려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내내 진행되었던 잔학행위가 계속되었다. 볼셰비키(소련)와의 전투에서 인도 주의 원칙이나 국제법 준수는 고려 대선은 안 된다는 1941년 히틀러의 지령으로  소련군 포로 570만 중 330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군 포로 사망자 비율이 약 58% 였다. 소련군 포로를 학살 학대 방치한 독일이었다.  제네바 협정에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 조항이 있었지만 나치 독일에게 소련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독일과 전쟁했던 영국과 미국은 포로 사망률은 3.5~5.1% 였던 것으로 봐도 히틀러의 파시즘이 나라별로 달라진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절멸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시스템까지 구축한 히틀러였다. 인종 말살 목적으로 나치 친위대 산하 특수 기동대까지 운영이 되며 보고 체계를 통해 절멸 경쟁까지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양심이 마비가 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게 만드는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독일의 영국침공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자신이 자랑하는 육군 기갑부대를 앞세워 프랑스를 침공한다. 마지노선을 뚫고 6주만에 파리를 함락한다. 직접 파리를 누비며 1차 대전에 한을 푼 히틀러는 내친김에 영국까지 침공한다.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영국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지만 영국의 처칠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독소전쟁이 이전에 서유럽을 먼저 침공한 히틀러는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즉시 항복, 노르웨이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2달만에 항복 , 네덜란드는 5일만에 항복, 벨기에는 2주만에 점령, 프랑스도 6주만에 항복하며 파죽지세로 유럽을 정복해나가던 독일이다.

 

 

그러나 영국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영국이 소련을 믿고 항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소련을 속전속결로 물리치면 영국도 항복할거라 판단했다.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히틀러는 언젠가는 소련을 침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스탈린도 나름대로 1939년에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1942년까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마친다는 것이 스탈린의 계획이었다. 1941년 독일은 최강의 전력 상태였고 소련은 아직 준비가 덜된 상태였다. 영국과 미국이 정부 기관에서 분석한 것은 지금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 3~4개월 내 승리를 예상했다.

1941년 6월 22일 개전 날짜까지 적시한 첩보가 오기도 했고 또한 치열했던 2차 대전의 암호 전쟁을 위한 독일의 발명품 기계로 암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앨런 튜링(천재 과학자)는 기계로 만든 암호를 기계로 풀겠다고 하며 만든 기계가 바로 콜로서스로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였다.

 

반면 미국은 나중에 독일군에게 에니그마를 훔쳐 암호를 해독한다. ㅋㅋ

 

 

소련은 정확한 첩보에도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았던 이유
1941년 6월 21일 독소 전쟁 전날 독일 병사가 내일 독일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알려주지만 스탈린은 그 병사를 총살시킨다.


간첩의 뜻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내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본인이 직접 간자와 첩자를 경험해본 인물로 간자와 첩자의 속성을 잘 알기때문에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전지적 스탈린의 관점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소련
현재 들어오는 정보는 영국 처칠의 농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이런 스탈린의 오판으로 소련 국경지역에는 경계 조치이나 정찰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독일에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소련이었다.

개전 초 소련군 탱크의 90% 가 파괴되고 공중에 떠보지도 못한 800개 이상의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개전 일주일도 안돼 독일군은 소련 영내 400km 까지 진출한다. 소련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 물자를 한창 준비하는 와중에 그 틈으로 독일이 침공한 것이다. 

 

브레스트 요새 
히틀러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소련 최전방 국경이 위치한 브레스트 요새는 갑작스런 독일의 침공에 무방비 상태였고 무기도 병역도 부족했지만 결사항전으로 한달 가까이 고립된 채 전투는 계속하지만 결국 요새가 함락되고 항복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병사들은 전멸한다. 

 독일군에게 저항하던 소년 병사가 병에 새긴 글 


소련군이 결사항전을 했던 이유
프랑스는 6주만에 항복해도 생존은 가능했지만 소련이 독일에 항복하면 절멸의 대상이기 때문에 소련인은 어짜피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고 + 애국심,+스탈린의 압박이 더해져 히틀러가 미쳐 생각 못한 소련인들의 저항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히틀러가 준비한 작전명 바르바로사
당시 독일인들이 가장 숭상하던 군주였는데 붉은 수염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 군을 북, 중, 남 3개 집단군으로 나눠 각기 다른 루트로 공격해 들어가는 작전을 계획한다.

 

바르바로사(1152~119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잠들어 있는 황제가 깨어나 동방원정을 떠날 것이다.

 


*북부집단군-공산주의를 싫어했던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해야 된다고 했고
*중부집단군은- 스탈린이 이는 모스크바가 목표
*남부집단군- 키예프를 공격 후 볼가강까지 진출해 유전확보를 목표였다. 소련의 남부지역 우크라이나 당시 공업지대이자 인구도 많았던 지역

 



재정 러시아때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쳤을 때는 조국전쟁이었는데 히틀러 독일과의 전쟁은 대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해마다 5월 9일되면 승전기념을 하고 독소 전쟁기간이 1418일(러시아 기준)을 기념하여 141.8m 전승 기념탑을 세웠다.

 

독소 전쟁 승전 기념탑

 

이 노래는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래로 우리나라 모래시계 타이틀 곡이기도 했던 유명한 곡

민간인 포함 3천만 명 이상이 사망한 독소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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