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레닌그라드 전투 (900일 봉쇄작전)

by 365 ^^ 2022. 1. 28.
반응형

[324회]

1941년 6월 22일 소련 공격을 명령한 히틀러는 세 갈래로 나뉘어 소련을 공격한다. 북부집단군-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 모스크바, 남부집단군-키예프으로 진군했다. 빠른 속도로 진격한 북부, 중부 집단군은 히틀러는 2달안에 소련을 점령할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소련에 진격하게 된다.  중부집단군은 단 이틀 만에 100km 주파하게 된다.   

 

 


히틀러의 최강 육군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에 다다른다. 소련의 상징적인 도시인 레닌그라드로 소련도 물러날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노인 부녀 아이들을 앞세워 방패막이로 삼았다. 레닌그라드 를 사수하기 위해 킬러의 독일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소련군이지만 그들은 끝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끝내 독일군에 응사하지 못해 위기해 처한 소련군이었다. 

 

영화 브래스트 요새 중 


독일의 북부집단군은 전방에서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면서 전방에서 이런 야만적인 전술을 많이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스탈린은 감상주의에 빠지지말고 우리 국민, 민간인이라고 하더라도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린다.  

 

레닌그라드 도시 

 

레닌그라드는 옛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1924년 레닌 사후 레닌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뜻의 레닌의 도시(=그라드)라는 뜻의 레닌그라드로 개칭했다.

 

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개칭 

래닌 그라드는 1905년 혁명, 1917년 2월 혁명, 1917년 10월 혁명 등 혁명도 3번이나 일어났던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이다.  

 

레닌그라드 세번의 혁명

뿐만 아니라 소련 최고의 공업지대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가 생산되는 도시이기 때문에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것은 정신적 타격뿐 아니라 군수물자 타격도 할수 있는 것이다.

 

 

레닌그라드 전투 (900일 봉쇄작전)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들어가지만 레닌그라드 시 앞에서 공격을 멈추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결사항전을 불사하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독일은 도시를 포위해서 굶어죽이는 고사작전으로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 작전에 들어갔다.  

 

이때 하루 배급식량양 

 

식량사정이 나빴을때는 하루에 빵 한조각으로 연명해야 했고 굶주린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먹을수 있는 모든 것을 섭취했다. 개,고양이, 새를 잡아먹고 심지어 가죽 구두, 허리띠 등을 물에 불려 요리를 했고 집안의 벽지 뒤 풀을 긁어 스프를 끓여먹기도 했다. 인육을 먹고 매매하기도 했던 시기다.  

 
타냐의 일기 

타냐의 일기는 레닌그라드의 비극을 기록한 일기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러시아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42년 8월 레닌그라드에서 타냐는 탈출하지만 영양실조로 결국 2년 뒤 병에 걸려 사망했다.

 

타냐의 일기
러시아 사람들은 자신을 지칭할때 나는, 1인칭 호칭을 사용하지만 타냐의 마지막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타냐만 남았다' 고 쓴것은 가족들이 기억되길 바라며 일기를 쓰고 본인도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느껴지는 부분으로 느껴진다.  

 

첫해 겨울 하루 사망자 수는 4천~5천명이었다.  1941년 12월 하루 사망자수는 1만 명에 육박했다. 이것은 비인도적 전쟁이 초래한 참상으로 레닌그라드 시민의 항복이 있엇다면 독일군 족쇄를 풀어주는 격으로 모스크바 점령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소전쟁의 결말이 뒤바뀌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볼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중부집단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공격을 중단하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린다.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 점령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히틀려의 갑작스런 작전 변동에 군 지도부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히틀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당시 모스크바는 방어전선이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중부집단군의 절반의 병력을 남부집단의 키예프를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히틀러의 갑작스런 작전 변경으로 전쟁은 한달 가량 지원이 되었고 이것은 히틀러의 오판으로 중부 집단군을 돌리지 않았다면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장기전 대비하기 위하여 전쟁물자가 중요했기 때문에 지하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빵바구니라는 별명(=곡창지대)을 가지고 있고 석탄도 많이 나온다. 또한 조금만 내려가면 바쿠라는 석유가 많이 나오는 곳도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보급선이 불안했던 이유

 

독일군의 보급선이 불안했던 이유는 독일, 소련 철도의 궤간(두 철로 사이의 간격) 이 달랐다. 독일은 1435mm 표준 궤간을 사용했으나 소련은 궤간은 1524mm 로 궤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독일의 보급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철도 궤간의 차이

이 궤간의 차이는 1812년 모스크바를 공격한 나폴레옹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나폴레옹 공격 후 25년 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가 철도 부설을 시작하는데 프랑스 침략의 트라우마로 유럽 궤간과 다르게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있다.  

 

철도 궤간이 넓은 이유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러시아는 땅이 넓은 나라이므로 궤간이 넓은 광궤가 적합하다. 넓고 평야지대가 많은 국토에 궤간을 넓게 만들면 차량도 크기만들수 있고 차량이 크면 고속운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련은 ‘라스푸티차’ 라고 해서 겨울을 전후로 봄과 가을에 땅이 진흙 땅이 되는 현상이 있다. 이로 인해 지반이 약화되기 때문에 궤간이 넓은 광궤를 설치하는 것이 철도의 하중분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2500개 공장을 분해
열차도 문제였지만 독일군의 보급,보병 부대가 말을 이용해 이동했기 때문이고 스탈린의 독일군은 어떤 물건도 남기지 않고 초토화 작전으로 재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랄산맥 서쪽에 있던 군수공장 2500개를 분해해서 열차로 옮긴 소련이었다.

 

대규모 공장의 기계를 분해 후 열차에 실어 운송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노동자 그들의 가족까지 탑승해서 동쪽으로 옮긴다. 불가능에 가까운 공장 2500개 수백만 명의 노동자를 동시 이동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해낸 스탈린이었다.  

 


 
태풍작전  
1941년 9월 전선 중앙부에 집결한 독일 중부 집단군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해 태풍작전을 명령한다. 1700대 이상의 전차, 190만 병력이 동원된 토네이도급 공격 작전이었다.  이에 모스크바 앞에 방어선을 친 소련군은 약 9만 명으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0만VS 9만 이었으나 스탈린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리하르트 조르게(독소전쟁 개전일을 알린 인물)라는 스파이가 있었다.  

 

소련 가장 유명한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1895~1944) 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신문 기자로 위장해 일본에서 활동한 소련의 간첩으로 조르게의 첩보가 2차 대전의 물줄기를 바꾼다 .

 

리하르트 조르게 (1895~1944)

일본에서 독일 신문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던 추축국들 독일, 일본등 의 정보를 빼내는 일을 했던 스파이로 소련에 그의 이름으로 지은 학교가 있을 정도로 소련의 영웅이다. 조르게의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소련인으로 조르게는 일본에 살면서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 기자드로가 친분 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을 철저히 열혈 나치 당원으로 위장 후 독일대사관을 출입해 고급정보를 수집했었다. 또한 미남계를 사용해 독일 대사관 육군 무관의 부인을 유혹해 고급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의 첩보 내용은 일본의 공격 방향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다. 극동을 지키고 있던 약 30개 사단이 일본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극동 쪽에 수많은 병력을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런 일본이 그쪽이 아닌 남방 공격을 예정이란 첩보를 입수하여 극동 병력 30개 사단을 모스크바 사수로 돌린 것이다. 이 첩보는 결정적 첩보가 된다.  

소련의 라스푸티차
병력이 모자란 이때 팔팔한 기운을 가진 시베리아 청년들이 집중 투입된 것이다. 또한 라스푸티차(러시아의 비가 내리는 10월과 눈이 녹는 3월에 땅이 진흙으로 변해 통행이 힘든 시기) 눈이 녹아 진흙으로 변하는 러시아의 비포장도로 개전 초기에는 이틀만에 100KM도 전진했던 독일군이 이 시기에는 하루 5~8KM도 움직이기 힘들정도였다.  

 


겨울을 나기 위한 소련과 독일의 군복 차이.  
소련은 보온을 중요시한 군복으로 철모가 아닌 털모자를 쓰고 있다. 독일은 비주얼 중심의 군복이었다. 이유는 청년층에게 멋진 군복을 선보여 나치군 선전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철모로 만든 모자를 썼다. 영하10가 넘어가는 겨울에는 이 모자는 살에 붙어 살점이 뜯겨져 나가기도 했다.   

 

다른 특징을 가진 독일, 소련 군복

독일 군복 디자이너는 휴고 보스이다.  선풍적 인기를 끈 휴고 보스의 군복으로 많은 청년들이 군에 입대를 했었다. 2011년 휴고 보스 사는 나치에 도움을 준것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장갑 또한 소련은 바레즈키라고 (=손모아장갑)  체온 상승을 돕는 형태로 제작된 반면, 독일군의 장갑은 손가락 장갑으로 전혀 보온이 되지 않아 동상에 걸리기 쉽다. 나치의 선전만을 위해 맹추위를 대비하지 않았던 히틀러였다. 동복 지급을 요청하지만 전쟁 장기화의신호이므로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될 것을 우려해 동복 지급을 거절한 것이다.  

 

소련은 바레즈키라 (=손모아장갑)

독일군은 30km앞까지 진격한다.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모스크바는 자체 붕괴가 될 뻔한 상황이었으나 1941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스탈린이 나타나 강한 모스크바 사수 의지를 드러내며 소련의 시민과 군이들을 마지막까지 독려하니 분위기가 반전되며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한다.  

 

강한 모스크바 사수 의지를 드러네며 소련의 시민과 군인들을 마지막까지 독려

 

3.스탈린그라드 전투 (천왕성 작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천왕성 작전 )

[325회] 1942년 8월 600여대의 폭격기가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시작된 독일군의 대공습으로 4만여명의 희생자가 나고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다. 6개월 기간동안 총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역사

jangane.tistory.com

 

1.히틀러는 왜 소련을 공격했나? (독소 불가침 조약 파기 이유 )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