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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프랑스 종교전쟁 끝 똘레랑스의 시작 (낭트칙령 내용) 80-2

by 365 ^^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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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글) 여왕 마고 피의 결혼식 : 성바를톨로메오 학살 80-1

 

마고의 피의 결혼식 이후 프랑스 국왕 샤를 9세는 갑자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각혈을 한다. 어머니의 강요에 밀려 피의 학살을 했던 샤를 9세를 이를 자책하다 병이 들어 사망하게된다. 이후 왕이 된 사람은 앙리 3세였다.  23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에 오른다. 그 역시 카트린 왕비의 섭정을 받으며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프랑스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 있던 앙리 4세에겐 도망칠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편이 필요했고 어미너와 오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고가 정치적인 파트너로써 앙리 4세와 손을 잡는다. 왕들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당시 왕 앙리 4세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막내 알랑송 왕자가 프랑스의 왕위를 이을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이에 마고와 앙리4세는 알랑송을 대외적으로 내세우며 당시 상황에 불만을 품었던 일부 세력들과 손을 잡았는데 그들의 이름은 불평당이었다. 알랑송을 앞세워 세력을 키워나간 불평당은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한 모의를 한다. 

 

당시 마고는 온갖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고 왕실의 견제를 피하기위해 그녀는 1572년 9월 알랑송을 루브르 궁전에서 탈출시켜 신교 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앙리 4세까지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다시 자신의 종교인 신교로 개종을 한다. 그리고 신교 세력을 규합해 숙적과 전쟁을 준비한다. 

 

버림 받은 마고 /알랑송 죽음 

이후 가톨릭과 신교 두 진영 간의 끝없는 내전이 계속 반복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앙리 4세는 카톨릭 중심지 파리 인근 지역까지 진출 하며 왕실을 위협 하기 시작한다. 결국 궁지에 몰리 카트린 왕비가 휴전을 제한하며 신교의 중심지인 네락을 방문 한다. 이렇게 전쟁이 멈추자 휴전을 계기로 네락에 있는 남편 앙리4세와 마고는 재회를 한다. 마고는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네락에서 파리로 잠시 돌아간 마고가 다른 남자를 만나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친오빠 국왕 앙리 3세는 마고를 루브르 궁전에서 추방하고 남편 앙리 4세는 마고를 버렸다. 그런데 이때 남동생 알랑송 왕자가 29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이제 앙리 3세, 마고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만 남게 된다. 알랑송의 사망은 프랑스 왕실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프랑스 법상 여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혈통은 마고의 남편 앙리 4세였다. 이렇게 되면 기즈 공작의 프랑스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망이 실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 앙리의 전쟁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이름이 앙리이다. 그래서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마고와 연관이 있었다. 이때 마고의 선택은 전 애인 앙리 드 기즈였다. 오빠인 앙리 3세와 남편 앙리 4세가 모두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완전히 태도를 바꾼 마고는 프랑스 남부에서 가톨릭 세력을 구축하고 거침없이 신교 약탈을 명령한다. 

 

현재 위송 궁전의 터

 

마고가 기즈 공작의 편을 들자 분노한 오빠 앙리 3세는 프랑스 위송으로 도망간 마고를 붙잡아 1586년 위송 궁전에 마고를 유폐시켜 전쟁에 관여 하지 못하도록 한다. 세 앙리의 전쟁에서 기즈 공작이 우위에 선다. 기즈 공작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의 영주들이 합세, 심지어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 펠리페 2세와도 동맹을 맺는다. 세력이 약한 앙리 3세는 어쩔수 없이 기즈 공작과 손을 잡게 되고 그렇게 프랑스 왕실 군대까지 기즈 공작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앙리 3세는 왕실과 신교가 맺어온 평화 조약을 모두 파기한다. 

 

쿠트라 전투 발발 

이에 앙리 4세는 이들과 맛 석기 위해 군대를 결집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신교도의 힘을 빌린다. 1587년 10월 앙리 4세의 군대가 쿠트라에서 7천여 명의 가톨릭 군대를 만나게 된다. 가톨릭 기병대가 돌진해오는 순간 신교 군대는 성경의 구절을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 곡의 의미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의미가 담긴 곡이었다. 그리고 신교 군대의 숨어 있던 화승총 부대의 기습 사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 전투의 결과는 앙리 4세의 대승리였다. 가톨릭 군대 병사 3000여 명이 사망, 기사와 귀족 400명 이상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즈 공작의 죽음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기즈 공작이 눈에 가시였던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파리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기즈 공작은 이를 무시하고 보란듯이 입성하고 파리시민은 환영한다. 이에 앙리 3세는 기즈 공작 일파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시민들은 앙리 3세가 폭정을 저지른다고 반발한다. 민중들이 봉기하자 앙리 3세는 궁저을 버리고 탈출한다. 이후 기즈 공작은 파리에 남아 반년이상 왕처럼 군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앙리 3세가 제안할 것이 있다며 기즈 공작을 자신의 거처로 부르고 기즈공작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앙리 3세의 죽음

기즈 공작이 죽자 기즈 공작의 죽음에 분노한 한 가톨릭 수도사가 앙리 3세를 찾아가서 그를 단검으로 찌르고 앙리 3세는 사망하게 된다. 이로써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대가 끊어지게 된다. 그래서 1589년 8월 2일 마고의 남편 앙리 4세가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앙리 4세의 개종

그러나 공식적으로 왕위를 받은 것과 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파리 시민들은 신교도인 앙리4세를 격렬하게 저항헸고 앙리 4세는 프랑스 왕이지만 파리 입성을 거부당했던 것이다. 결국 1590년 5월 앙리 4세는 파리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 앙리 4세는 파리를 애워싸고 통째로 봉쇄해 버린다. 식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인근 풍차를 불태워 빵을 만들지도 못하게 했다. 봉쇄가 무려 5개월이나 이어지면서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포위전으로 파리인구 4만~5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파리시민들은 끝까지 결사항전을 한다. 이에 앙리 4세는 다시한번 개종을 결심한다. 앙리 4세는 생개 개종을 6번이나 한 인물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그를 인정했고 파리에 무사히 입성한 앙리 4세는 무사히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수백년을 이어왔던 발루아 왕가가 몰락하고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를 열며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가이자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발전시킨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게 된다.

 

낭트 칙령 

왕이 된 앙리 4세는 종교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앙리 4세는 종교적 차별을 없애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 그렇게 나온 것이 1598년 낭트 칙령이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문서 중 하나로 평가된다. 

 

낭트 칙령의 주요내용

 

앙리 4세의 죽음 

낭트 칙령이 반포되면서 36년간의 종교전쟁은 종전된다.  위송에 위폐되어 있던 마고는 앙리 4세와 이혼 후 파리로 돌아온다. 이후 발루아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어 준다. 한때 신교도였고 부르봉 왕가의 첫 왕이라 왕권이 불안했기 때문에 지난 발루아 왕조 마고의 지지는 앙리 4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마고의 지지덕분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를 복구하고 평화와 발전을 이루며 앙리 4세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1610년 앙리 4세엑 불만을 품은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한다. 

 

관용 (똘레랑스) 시작 

이후 프랑스에서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자리 잡은 가치관 중의 하나가 바로 똘레랑스 관용이다.  관용은 프랑스를 자유의 나라로 만드는 중요한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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