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회 리뷰]
오늘의 탐사지: 통영
주제: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출연자 :김명민, 김인권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 통영으로 간다. 통영의 이순신 공원에서 만남을 갖은 뒤 세병관으로 이동 후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 및 전개과정 등을 공부하고 도남 관광지로 향한다. 이곳에서 실제크기의 거북선을 관람한 후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학익진 전법을 펼친 한산도로 이동 한산대첩에 대해 공부한다.
이순신 공원에서
통영의 어원은 무엇일까?
원래는 두룡포라는 이름의 작은 촌락었으나 이순신이 이 곳에 부임한 후 왜구와의 해전에서 연승 행진을 하며 조선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고 이곳이 통제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이란?
삼도(경상,전라,충청)의 수군 전체를 통솔하는 해상 방어 총 사령부를 삼도수군 통제영이라 한다.
이순신의 탄생
1545년 건청동(충무로)에서 출생으로 32세에 무과에 급제한다. 첫 부임지가 변방인 함경도였다. 여러 정치적 싸움과 직면해야 했던 시대였고 인사권을 쥔 병조 정랑이 직속상관이었는데 이순신은 상관의 인사 비리를 비판하고 대들어서 충청도로 좌천 후 파직을 당하고 변방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한성 건천동 죽마고우였고 이순신의 3살 형인 유성룡은 일찍이 이순신의 성품을 파악하고 강력한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로 천거를 한다. 초고속 승진 이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간쟁을 담당했던 기관인 사간헌(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던 부서)에서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선조가 무마시키고 이순신을 천거한다. 원래는 선조가 원균에게 주려던 자리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이순신에게 직책이 넘어 갔던 것이다. 이것이 원균과의 악연의 시작이라고 볼수 있다.
세병관
세병관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곳은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이순신 사후에 세워진 곳이다. 세병관의 뜻은 무기를 닦는 곳이란 의미다.
삼도 수군 통제영에는 굉장히 많은 건물이 있었고 삼도 수군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라고 불수 있다. (조선 해군 본부의 중심 건물).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고 유일하게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된 건물이 세병관이다.
☆세병관은 무엇으로 병기를 닦았다는 의미였을까요?
1. 병기에 있는 피를 은하수로 닦는다는 의미로 임진왜란 이후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병기를 씻겠다는 의미.
2. 병기를 닦고 수리 중이니 다시는 쳐 들어 올 생각하지 마라는 경고의 의미.
3. 피,땀,눈물로 얼룩진 사람들의 한을 은하수로 씻어준다는 의미.
여러 의미가 담긴 세병관이다.
임진왜란의 뜻은?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온 난. 임진왜란은 우리 입장에서 일본을 낮춰 부르는 이름인데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선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임진전쟁이라고 명명한다.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다른 전쟁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최고의 육군이었던 왜군과 최고의 수군이었던 조선군이 맞붙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왜 Why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는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여 년 간 지속된 전국 시대 혼란기를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조총으로 평정한다. 전쟁이 끝나면 군인들이 모두 실업자가 되니 일본 내부의 불만과 잉여 에너지를 해소할 방안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 통일 이후 국내 정세가 불안하고 생각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를 원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전략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은 명나라(중국)를 정복하기 위한 발판일 뿐 조선을 넘어 명나라를 치고 인도 정복까지 세계를 정복 할 꿈을 꾸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한다.
'정명 가도: 명을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비켜라 '
그러나 우리 조정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만다. 이에 일본은 조선의 왕만 인질로 잡으면 끝이니 속전 속결로 달려와 왕을 생포하는 작전을 계획한다. 결국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침략하고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 온 왜군은 순식간에 조선군을 초토화하고 단 20일만에 한양에 도착한다. 그러나 한양에 도착한 왜군은 놀라고 마는데..
두둥~~~
이미 궁궐을 버리고 떠난 왕, 선조 임금은 이미 평양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때 선조를 추격했던 일본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오마사였다. 그는 평양으로 단숨에 달려 갔으나 다시 한번 놀란다.
그리고 고니시는 의주로 가는 길에 발이 묶인다.
파죽지세 왜장은 왜 멈출 수밖에 없었을까?
이유는 보급로가 차단됐기 때문이다. 왜군의 보급로는 물길이었는데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이순신의 첫 승전보 옥포해전
왜군의 대선18척, 중선 6척, 소선2척 등을 싹쓸이 격파한다. 아군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던 완벽한 승리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를 기록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첫 승전보를 들려준 것이 이순신의 옥포해전이다. 이 승리는 조선군 전체에 사기를 드높여준 아주 뜻 깊은 승전보였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7년여간 수많은 전투를 승리를 하며 한산도,명량, 노량 등에서 도합 700~800여 척을 격파함으로써 왜군에게 끔직한 공포를 심어줬던 조선의 희망이였던 이순신 장군의 수많은 업적들의 첫 시작을 알리는 승리였다.
도남 관광지
한강거북선
이곳에는 실제로 한강을 다니던 거북선이 있다. 충무고의 호국정신을 기리기위해 1990년 서울시가 22억원을 들여 복원 후 유람선을 사용되던 것을 통영으로 가져왔다.
이순신은 어떻게 알고 전쟁을 대비했을까?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부터 전쟁 준비를 했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순신은 전쟁이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 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 거북선을 만들고 함포사격 훈련까지 유비무환을 실천했던 이순신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원리원칙 주의자로 묘사된다.
무서운 장수였지만 대쪽같은 엄격함 속에 또 다른 모습도 있다.같이 밥도 나눠 먹고 격려도 해주고 부하들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던 덕장 이순신이였다.
거북선 내부
격군이란?
격군은 전투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를 말한다. 조선 시대 격군은 형벌과도 같았던 임무였다. 차라리 곤장을 맞지 수군으로 가서 격군은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고되고 너무 힘든 임무였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단 한 순간의 쉴 틈도 없이 목숨 걸고 끊임없이 노를 저은 무명의 영웅들이다. 이들을 기리진 못 해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영웅들이다.
한산도
이순신 장군이 3년 8개월 동안 머문 곳이 한산도이다.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 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했다. 해안선이 구불구불해서 배를 숨기기도 좋고 지리적 위치도 해전에 유리한 지형이기 때문이였다.
제승당
제승당의 뜻은?
승리를 만드는 곳 ,집 당 이길 승 지을 제
제승당의 또 다른 이름 운주당이 있다. 의미는 술도 마시고 소통도 하는 곳이란 뜻이다. 지위 상관없이 병사들과 토론의 장을 이곳에서 펼쳤던 소통의 장이였던 곳이다.
제승당 내부에는
엄청난 크기의 제승당 현판이 있다.
현재 제승당 밖에 걸려 있는 현판은? 107대 통제사 조경의 친필이다.
김구 선생님이 한산도를 방문 했던 일화
광복 이듬해 1946년 광복은 했는데도 너무 힘든 때였다. 나라에 분단 뒤기가 닥쳤던 그 시기에 국외에서 활동하던 김구 선생님은 한산도를 방문한다.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한산도에 온 김구 선생님은 140대 통제사가 쓴 현판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현판도 다시 세우고 기념촬영까지 한다.
수루
수루란?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루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자주 들렸던 곳이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의 고민과 시름을 달랬던 곳이 바로 이 수루이다.
필체에도 느껴지는 충무공의 강직한 품성, 인간적인 고민과 시름을 달랬던 수루
한산대첩의 학익진 전법
옥포해전에서의 첫 승리에 힘입어 조선수군의 기세를 몰아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을 이끌고 승리를 한다. 그리고 1592년 7월8일 운명의 한산대첩은 그들의 뇌리에 이순신을 각인시킨다. 이전에는 왜군들은 이순신을 잘 알지 못했다.
사천해전까지 연전연패를 하고 나서 조선 수군에 맞설 에이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영화 명량: 조진웅 배역)를 내보낸다. 왜군은 70여 척의 왜선을 가지고 견내랑(거제도)에 정박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선승이후구전' (손자병법 중) 이기고 나서 전투에 임한다는 뜻으로
싸울 장소,때, 상황은 내가 결정한다.
이순신은 견내랑에 들어가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대형 선박이라 기동성이 느리고 반면 왜선은 작지만 빨랐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해전에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그래서 넓은 바다로 적을 유인하기 위해 소규모 함대(5척정도)를 보낸다. 우리 군대는 전투하다가 겁먹은 척 도망을 쳤다. 그러자 의심 없이 일본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로 따라 나왔다.
그러자 우리 수군은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해서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학익진 전법으로 왜구를 포위 후 적군을 무찌른다. 그 한가운데에 역시 거북선이 있었다. 우리군은 대승을 한다.
한산도 대첩의 결과
일본의 배는 모두 침몰을 한다. 조선은 한 척의 배도 침몰하지 않았다. 일본의 에이스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대패를 하고 나서 구사일생으로 탈출 후 미역만 뜯어먹으며 연명을 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들의 그 후손들은 폐전 일에 미역을 먹는 풍습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이순신과 맞붙는데 그것이 바로 명량해전이다.
충무사
예를 갖춰 향을 피우고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나라를 지켜준 이순신 장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
다음편에 계속.....
☞진주성 촉석루의 진주대첩/남해 관음포 노량해전 [선녀들 7회]
▼한산도 섬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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