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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진주성 촉석루의 논개 이야기 (남강유등축제 기원)

by 짱신나^^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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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7회]

 

 

오늘의 탐사지: 진주성 촉석루

주제: 임진왜란의 이름없는 영웅들

 

출연자: 업텐션 이진혁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진주성을 둘러보며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에 대해 알아본다. 진주성안의 촉석루에서 논개와 이름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진주성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행주대첩

 

 

진주성 북문이 이름은? 

 

 

진주성의 북문 이름은 [공 (마주 잡을 공) 북(북녘 북) 문] 공북문이다. 

 

 

=두 손을 맞잡아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다 

 

 

왜 북쪽을 향해 공경을 표했을까?

 

 

조선시대에는 북쪽에 임금이 있다. (북쪽=임금)을 의미하므로 신하가 공손하게 절을 올린다는 의미에서 공북문이라 한다. 

 

 

김시민 장군의 시호는? 

 

 

 

 

 

▶임진왜란에서 진주 대첩이 갖는 의미는? 

 

임금을 잡기 위해 빠르게 북상하던 왜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진주를 점령해야 했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촉석루 아래는 남강이 흐르는데 그 당시에 다리가 덕분에 외부침입이 어려웠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 대첩을 승리를 이끈 심리 전술은?

 

1. 허수아비 설치 

 

그로 인해 총알을 낭비하게 하는 목적이다.

 

 

2. 여자와 노인들을 남장과 변장해서 병사 수를 많아 보이게 하기

3. 휘장과 장막 이용해서 병력을 많아 보이게 했다. 

 

이런 심리 전술 펼친 덕분에 왜군은 7배의 병력으로도 진주성을 함락 시키지 못했다. 

 

 

 

 

 

 

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약 3,800명의 군사로 약 2~30,000명의 왜군을 물리치고 조선에 기적의 승리를 이끌어낸 분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10월 5일 아침이였다. 왜군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듣고 허수아비, 남장 여인등을 동원해 군사가 많은 척 위장을 하고 김시민 장군의 지휘 아래 철저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다음날 10월6일 (성을 뺏는 공성전에 특화된) 3만 왜군들은 순식간에 진주성을 포위했다.

 

김시민 장군의 첫 번째 명령은 "대응하지 마라" 였다.

 

 

무기의 재활용

 

조선군은 군사도 무기도 열세했기 때문에 왜군이 화살을 쏘면 허수아비에 꽃힌 적군 화살을 뽑아 그대로 재활용했다. 

 

 

또한 '대장군전'이란 무기 나무 미사일을 이용해 적군의 탑을 붕괴시키고 새알 처럼 생긴 '조란탄' 300개를 대포에 넣고 

 

 

백성들은 물을 끓여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왜군에게 그 뜨거운 물을 부었다. 

 

 

심리전을 이용

 

6일 동안 밤낮없이 전투는 이어졌다. 조선군과 왜군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고 왜군은 포로로 잡은 조선의 아이들을 이용해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한다.  이런 심리전에  분노한 진주성 조선군들은 오히려 사기가 올라갔다. 김시민은 이를 똑같은 심리전으로 맞대응한다. 거문고와 퉁소를 연주해 왜군의 향수를 자극하는 심리전을 펼친다. 

 

 

 

 

 

 

 

 

유등으로 적을 교란

 

진주 남강 유등 축제의 기원 

 

 

진주성 전투 중 밤에 횃불 시위로 적을 교란 시켰는데 이는 한계가 있자 유등을 켜서 적을 교란시켰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진주 대첩이 일어났던 10월이 되면 진주 남강에 유등을 밝히고 순국한 민,관,군을 추모하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진주 유등 축제가 열린다.  

 

 

 

의병의 지원 

 

이들이 마음을 잡고 진주성을 치려는 뒤에서 의병이 지원군으로 나타난다.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집결해 진주성 바깥에서 동서남북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다. 홍의 장군 곽재우의 지휘아래 게릴라전으로 왜군을 교란시켰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6일째 동문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은 앞에서 진두지휘를 하는 도중 적군의 총탄에 이마를 맞고 전사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이광학 장군이

 

 

분노의 화살을 날려 왜군의 적장을 명중시키며 사살하고

 

 

왜군은 백기를 들고 퇴각했고 진주성 전투는 승리로 끝이 난다.  

 

 

진주대첩의 전사자수는 조선군 8백여 명 , 왜군은 1만여 명으로 추정한다. 

 

 

 

사십여일 동안 싸우다 순절한 김시민 장군의 소식은 진주성 군민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고 이들은 부모님의 상을 당한 것처럼 1년 동안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으며 통곡에 잠겼다고 한다. 

 

 

 

진주대첩 의의 

 

진주대첩은 7:1 정도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임진왜란 발발 후 육지에서 거둔 최대 승리였고  우리의 곡창 지대를 사수하고 이순신 장군이 활동할 수 있도록 전라도를 잘 지켜낸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상징적인 전투였다. 

 

 

 

 

 

 

 

 

2차 진주성 전투

그로부터 9개월 후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다. 

일본의 보급로가 끊겨 주춤 했을때 때마침 명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해 들어온다. 명과 연합 후 평양을 탈환하고 일본군은 한양까지 밀려 내려온다. 이때 조선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벽제관 (지금의 일산) 전투에서 대패를 했다. 일본군은 추위에 지쳐있었고 명나라 또한 싸우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땅에서 조선을 배제한 채로 강화교섭을 강행했다. 이렇게 휴전협상 중이던 그때 왜군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갈을 보내온다. 

 

 

 

그리하여 10만여 명의 왜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침략한다. 1차 진주성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1차 진주성 전투 때보다 약 3배의 왜군을 보냈고 10만여 명의 왜군는 진주성을  6개의 부대로 나누어 포위한 후 무차별 공격을 한다.

 

 

 

일본은 휴전 중에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자행한 것이다. 당시 왜군이 학살한 조선인만 약 6만 명이였다.

 

 

이렇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리군은 처참히 너무졌다.

 

 

 

 

촉석루

CNN이 선정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Top 50' 에 선정 

 

평상시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임진왜란때는 지휘본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촉석루

 

벼랑끝에 솟아 있다고 해서 촉서루이다. 

 

벼랑 끝에 솟아 있다고 해서 촉석루

 

촉석루는 진주 8경 중에 제1경에 해당한다. 

 

 

 

 

 

논개 이야기 

 

 

2차 진주성 전투 때 승리한 왜군은 촉석루에서 축하연을 벌인다. 그때 술에 취한 왜장을 절벽 근처로 유인해 가락지를 낀 열 손가락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하다. 

 

 

이렇게 논개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논개의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몽인이 전국팔도를 다니며 기록한 '어우야담'에는 논개의 이야기가 있다. 

 

 

진주 사람들은 지금도 임진왜란때 공을 인정받지 못했던 이름 모를 백성들과 논개를 기억하기 위해 논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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