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악티움 해전은 시대를 가른 대사건으로 악티움 해전 이전은 헬레니즘 시대로 알렉산드로 대왕이 인도까지 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이 되는 특징이 헬레니즘 시대였고 악티움 해전을 계기로 로마 제국 시대로 넘어간다.
로마공화정->로마제정
로마사 시점에서 보면 악티움 해전 이전, 후는 로마 공화정에서 로마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왕이 없이 시민들이 참여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던 공화정 로마시대에서 로마 제정(황제)가 있는 시대로 넘어간다.
Republic of Korea =Repulic =공화국
Res+publica 라는 라이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res는 일, things , affairs, publica-공적인 =공적인 일 .
악티움 전쟁
안토니우스 VS 옥타비아누스를 보면 로마 사람이 맞대결한 것이니 내전으로 볼수 있으나 헬레니즘 국가의 마지막 나라 이집트가 정복이 되었기 때문에 국제전의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악티움 전쟁의 중심 인물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왜 불화가 일어난 걸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누구?
이들의 불화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뿌린 비극의 씨앗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로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며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꿈꾸며 로마 최고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독주를 경계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 당하면서 당대 최고의 장수였던 인물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카이사르의 최후와 브루투스의 배신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했다고 알려진 "브루투스 너마저...."는 사실 셰익스피어가 희곡 율리시스 시저에서 사용해 유명해진 말이다. 로마사 사료에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브루투스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카이사르가 한 마지막 말은. 아이야 너마져...로 '아이' 라는 말은 그만큼 아꼈다는 것이다. 브루투스는 정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이것으로 브루투스는 제 2제의 배신자로 등극, 단테의 신곡에 보면 브루투스, 카시우스, 가룟 유다 (예수를 배반한 사람) 배신자 3사람이 지옥의 맨 밑바닥에 있을 만큼 그의 배신은 충격적이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절대 권력자가 죽게되자 그 뒤를 이를 후계자로 카이사르의 심복이자 전장을 함께 누빈 안토니오스가 유력했다. 기원전 48년 이집트를 방문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게 된다. 이름 조차 '작은 카이사르' 라는 뜻의 '카이사리온'이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리온은 혼외자였고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당시 안토니우스가 나이로도 적절했지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내 누나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는다고 남겼다. 전장을 누비며 다녔기때문에 항상 유서를 써놨던 카이사르였고 아들도 없고 딸도 죽었기 때문에 누나의 딸의 아들 옥타비아누스(당시 18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를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도 당시 로마에 머물던 상황으로 내심 기대했었으나 아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자 실망했다.
악티움 전쟁의 원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계기는 로마가 커서 이를 나누어 통치하던 중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지역을 맡은 안토니우스가 통치 중 자연스럽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거기에 분노, 동병상련의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는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향하게 된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의 협상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룬디시움에 모여 협상을 하게 되고 아직은 서로가 필요했던 상황이라 분쟁 해결과 타협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각자의 영토는 그대로 두고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누나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킨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두 딸을 낳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재회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다시 만난다. 동방원정을 위해 물자와 병력이 필요해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갔던 것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안좋은 소문을 내고 로마의 민심이 옥타비아누스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자식들을 왕중왕, 왕중여왕이라고 칭했으며 그들에게 영토 분할 기증을 약속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 내용
악화된 여론 속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일격을 계획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해 버린 것이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살아 있었고 사후에 공개될 것을 바라며 로마 베스타 신전의 신녀들에게 맡겨놓았던 유언장을 옥타비아누스가 불법적으로 탈취한 후에 유언장의 내용을 사전에 파악한 뒤 원로원에게 알린 것이다.
이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 전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로마 ->이집트에 전쟁선포
기원전 32년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을 선포한 로마였다. 이에 맞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연합군을 조직해 대응한다. 악티움 해전의 본격적인 서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집트는 해군력이 강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해전을 제안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 휘하 장군들은 안토니우스는 지상전에 강한 사람들이라 해전을 반대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원정에 참여하는데 가장 반대했던 두 사람이 모욕을 당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 앞바다 악티움에서 해전이 벌어진다. 이집트와 로마의 해전이었다. 로마에는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아그리파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성공에 크게 공헌한 로마 장군 아그리파는 해상 봉쇄로 안토니우스 부대를 고립시키고 안토니우스 부대는 식량이 부족해지고 전염병까지 돌면서 병사들이 사망, 이탈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옥타비아누의 정치 선전으로 탈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집트의 패배
해전에는 육지전과 다른 요소가 많았다. 크고 단단한 안토니우스 군선은 충돌 공격, 방어에 유리했고 옥타비아누스의 군선은 작지만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다.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악티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뱃머리를 돌려 전선을 이탈한다. 이를 본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후퇴한다. 안토니우스의 도망을 명분삼아 부하들도 도망을 쳤고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1년 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전쟁을 재개하지만 이집트는 패배한다.
악티움 전쟁 결과
악티움 전쟁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최후를 맞는다. 이렇게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의 죽음으로 헬레니즘 시대(그리스의 확장판)는 막을 내리게 되고 온전한 로마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 이후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된 로마 내전도 끝나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출발을 선언할수 있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 기회를 잡은 옥타비아누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가로써 여론을 잘 이용했고 정적이 없는 유일한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은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인민에게 반납한다. 고 민정이양을 선언한다. 권력을 내려놓는 모양새를 통해 오히려 더 큰 권력(군사통치권등)을 획득하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이다. 카이사르를 암살하면서 지키려 했던 공공의 것의 가치가 사라지고 다시 제국의 시대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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