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은 예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다. 1453년은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일 때 중세와 근세의 전환점이 되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진 시기이다. 1453년 4월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 왕은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 쳐들어온다. 이것은 동로마 최후의 도시를 둘러싼 이슬람교와 기독교간의 대격전이었다.
1분 로마역사
기원전 8세기 로마제국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당시 로마는 작은 수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로마의 영역이 확대되어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확대되고 더 시간이 흘러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수도를 로마에서 현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동한다. 그 후에 395년 이탈리아 로마는 서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되지만 서로마제국이 결국 멸망하고 서로마 멸망 후에도 약 1000년간 동로마 제국이 지속된다.
그리고 1453년 동로마 제국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진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고 했던 이유는?
1120년간 유럽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지정학적 위치는 정말 중요했는데 위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 아래쪽은 아프리카가 위치해있는 사통팔달의 위치였고 당시 실크로드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은 콘스탄티노플뿐이었고 전성기때 최고급 이집트 밀로만든 빵을 전 시민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할 만큼 부유했던 도시로 콘스탄티노플의 경제적 이득까지 얻을수 있는 지역였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 터키의 역사(이슬람) 는 흉노족에서 시작되는데 흉노에서 돌궐을 이어받아 위구르 제국을 만들어 계속 서쪽으로 가서 터키에 도착한 후 북아프리카, 스페인의 일부까지 점령(이슬람 역사) 한후 서쪽 확장을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콘스탄티노플로 절체 절명의 시기에 정복 목표가 된 콘스탄티노플이 열쇠였다. 이때 무함마드의 예언(콘스탄티노플 정복하는 이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는 지름길) 과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준비한다.
메흐메트 2세
자녀에게 예수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처럼 무함마드를 약간 변형한 이름 메흐메트로 부른다. 메흐메트 2세는 군사적인 지식은 물론 학문에도 뛰어났던 인물을 말할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 무함마드,메흐메트= 칭찬받는 자, 예언자
- 술탄 = 이슬람권에서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명칭
- 칼리프=종교 지도자
오스만제국은 정치, 종교지도자를 모두 겸한 것이 술탄이었다. 수백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이슬람 군대였으나 그 수백년의 꿈을 초월적 카리스마 지도자 메흐메트 2세가 이룬 것이다.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오스만제국 이전에도 러시아, 헝가리, 불가리아등도 다수의 국가가 탐냈던 콘스탄티노플이었으나 이제까지 1000년동안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3중 성벽(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5세기에 지음)으로 된 난공불락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또한 해자는 넓이가 20M 5~10M 깊이로 건너기 쉽지 않았다.
바다쪽에도 마르마다 해협의 최대 수심은 80M정도로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이여서 바다 쪽 유일한 진입로는 골든 혼(Golden Horn 금각만) 항구로 이곳에는 거대한 쇠사슬을 설치해놔서 적군의 함대가 들어오면 쇠사슬을 당겨서 입구를 막아 배 한대도 들어 올수 없는 곳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어떻게 오스만제국에게 정복당했나?
오스만 제국의 봉쇄
메흐메트는 철저한 준비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길목에 요새를 설치해 무역선을 차단해 경제적 봉쇄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상인들이 줄기 시작했다. 전성기 시대의 거대했던 로마영토였는데 1453년되면 오스만 제국이 주변 영토 대부분을 차지해 콘스탄티노플만 남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도 5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당시 주변국도 전쟁, 정치적, 종교적 내분 등으로 병력지원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청동대포 사용
철옹성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8m 대포를 제작했다. 헝가리인 우르반이 대포제작했고 포탄 무게는 500kg 정도인데 이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황소 60마리, 군인 200명이 동원되었다. 처음 헝가리인 우르반이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가져가서 팔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그는 적국인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에게 가져갔고 그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시한 금액의 4배를 지불하고 10대 이상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포를 한번 쏘고 나면 청동을 식히는데만 3시간이 걸려서 큰 효력을 봤다고 볼수 없었으나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다.
최정예부대를 투입
콘스탄티노플원정에 투입된 바쉬보주크, 예니체리를 투입했다.
바쉬보주크(bASIBOZUK) 용병부대
이들은 파상공세(파도가 밀려오듯 연속으로 공격)를 펼쳤는데 전투 초반에 바쉬보주크(bASIBOZUK) 용병부대를 투입했다. 갑옷대신 짐승가죽을 입고, 앞니를모두 뽑은 험악한 모습으로 전투에 임했다. 바쉬보주크의 뜻은 머리통을 깨부순다는 뜻으로 대리석 곤봉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대리석 곤봉을 사용했던 이유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갑옷이 튼튼했기 때문에 대리석 곤봉으로 격파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해서 사용했다.
예니체리 부대
다음으로 투입되던 부대가 예니체리부대로 공포의 악마 군단이었다. 결혼을 할수 없고 오직 술탄만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군사적으로 훈련 받은 것이 아니라 전문 대학에서 학문도 하는 문과 무을 겸비한 엘리트 군대였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승리
1453년 4월 오스만 군대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활과 돌로 콘스탄티노플의 강력한 방어가 이어졌다. 4시간의 격전끝에 콘스탄티노플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 전투로 오스만군은 200여명이 전사를 했다.
오스만제국의 기발한 아이디어
이렇게 되니 오스만 군대 내부에서는 철수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육지 성벽 공격을 포기하고 바다로 공격을 개시한다. 쇠사슬로 막혀있던 보스포로스 해협이였기에 오스만 제국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것은 바로 배를 육지로 이동해 옮겼던 것이다. 기름을 바른 통나무를 깔아 배 바퀴 역할을 하게해서 배 72척을 하루밤 사이에 움직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반드시 정복하겠다는 의지가 원동력이였다. 이것은 초유의 역사적 사건으로 메흐메스 2세의 창의성 및 지략이 돋보이는 이 전쟁은 세계 10대 전쟁사에 들어간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당시 성벽에 모든 병사들이 집중하고 있던 사이 해협쪽은 무방비 상태로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군대는 분산이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1453년 5월 29일 최후의 공격을 앞두고 오스만 군대는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에서 알라에게 기도를 올린다. 허물어진 성벽 안으로 군사들이 진격하기 시작하자 성 안에서 마지막 격전이 벌어진다. 이 격전에서 승리한 오스만 제국은 공략 53일 만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 한다.
메흐메트의 관용과 포용정책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메흐메트 2세는 시민들의 재산과 종교를 모두 인정했다. 이때 그리스 정교,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인 아야 소피아 성당을 그대로 남겨놨고 현재도 기독교, 이슬람교의 양식이 함께 보존되어있다. 유네스코는 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태이다. 또한 현재도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는 이스탄불에 위치해 있다. 모든 종교가 품고 있는 포용, 관용의 정신을 600 년간 이어갔던 오스만제국이다.
그리스인의 관점
이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끝까지 항전했고 지금까지도 미스터리인 그의 시신이 어디있는지 확인이 안됐다. 황제의 시신이 훼손당할 것을 염려해 몰래 묻었고 어떤 시민도 이 장소를 얘기하지 않은 것도 그들의 종교와 가치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고 볼수 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세상의 종말'로 표현했고 그리스와 터키사이에서는 교과서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그리스 역사에서는 현재까지도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로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이다. 언젠간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역사적 의의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인류 역사를 바꾼 변곡점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었고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대항해시대의 촉매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브래인들이 서유럽으로 과학, 기술, 문화를 전파하게 되면서 유럽 르네상스가 꽃피기 시작했으며 오스만 제국이 걸프해 홍해 지중해 세계 물류길을 장악하면서 경제적 위기가 오게 되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 유럽인들로 인해 대항해시대를 촉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 역사는 근세가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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