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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조직 폭력배 역사 : 정치깡패- 조폭 성장 배경 425-1

by 짱신나^^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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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깡패 등장배경 

대한민국 조폭 1세대는 소설과 영화 등에서 항일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광복 이후에는 그 모습이 조금 달라진다. 이들이 정치인과 손을 잡으면서 정치깡패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주먹 세계의 명분은 항일이 아니라 반공이었다. 이때 김두환은 조선민주청년총동맹을 결성해서 좌익인사를 납치 및 테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익인사의 선봉에 서게 된다. 또한 이정재, 임화수 등도 이승만 정부와 결탁하며 정치 테러를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깡패에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1960년 4월 18일 고대생 습격 사건 때문이다. 4.19 하루 전날이었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김주열 학생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분노로 서울에서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중 자유당 소속 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의 습격받게 된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4.19 혁명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승만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 박정희 정부는 대대적인 정치깡패 소탕 작전을 벌인다. 이때 이정재, 임화수는 사형을 받게 되고 폭력배 13000명 이상이 검거되었으며 장기 징역형 혹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며 정치깡패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듯했다. 

 

전국구 조폭 시대 

사보이호텔 기습사건 

1970년 경제가 성장하면서 항일, 반공보다 더욱 강력한 돈의 이데올로기가 생기면서 지방 조폭들이 서울로 집결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의 패권을 잡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다. 전국구 조폭 시대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 1975년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이다.

 

현재도 명동에 위치한 사보이 호텔

 

1975년 정초에 범호남파 조양은 세력이 사보이호텔에서 1960년대 이후 명동을 중심으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신상사파를 급습한다. 이후 조양은이 조직 내에서 급부상하며 범호남파는 내부 분열하게 된다. 조양은은 1990년 중반 만기 출소 후에도 살인미수, 사기, 폭력 행위 등으로 또다시 기소되었고 2000년 이후에도 공갈, 도박, 외화관리법 위반등의 범죄 행각을 계속하였다.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을 계기로 생선회칼 등의 흉기가 본격 사용되었다. 일종의 조폭 칼잡이 시대가 열렸고 연령대가 낮은 신세대 조폭들이 등장하면서 조폭계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남 출신 조폭들이 서울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을 일으킨 범호남파,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당사자 진석이파가 모두 호남 출신 조폭들이다. 

 

호남출신 조폭 성장이유

호남출신 조폭이 성장한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과 연관이 있다. 당시 경제개발은 서울-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축 중심의 불균형한 개발이 이뤄졌고 영남의 조폭은 지역 내의 이권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이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전두환 폭력배소탕작전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는 조폭 소탕을 위해  계엄 포고 제13호를 발령해 대대적인 폭력배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그들의 순화교육장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고 순화 교육 대상자만 약 4만 명에 달했다.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아야만 했던 폭력 조직원을 비롯한 전과자들은 헌병의 삼엄한 감시 아래 가혹한 육체 훈련을 강행했다. 

 

▶ 삼청교육대 실체를 알아보다.

 

삼청교육대 실체를 알아보다.

삼청교육대 만든 배경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고 계속되는 권력다툼 끝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군사 반란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jangane.tistory.com

 

삼청교육대 설치 약 6년 후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신군부는 사회 정화 사업이 실패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격리되고 위축된 기존의 폭력 조직으로 인해 신진 조폭세력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중에 하나가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가해조직 진석이파였다. 

 

강남 유흥업소 발달이유 

한편으로는 1980년 중반으로 가면서 기존 조직폭력배들이 풀려나면서 또 다른 이권 쟁탈이 시작된다. 1980년대 중반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유리한 저유가, 저환율, 저금의 3저 현상으로 인해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향락, 유흥산업도 번창하게 되었다. 이런 유흥산업은 직간접적으로 조직폭력배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호황으로 유흥산업이 발전하면 조직 폭력배 역시 성장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에서 강남이 서울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기업형 조폭 성장 배경 

강남지역 개발을 위한 인구 이동을 위해 강북지역에 룸살롱 카바레 나이트클럽등 식품 접객업소의 신규 설치를 불허하면서 강남에 유흥가가 조성된다. 이로 인해 강북의 유흥업소도 옮기기 시작하면서 강남 유흥업소는 최대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4년 통계로 확인되는 유흥업소는 5400여 개였으나 1985년 1년 사이에 13000여 개로 2배 이상 폭증했다. 특히 강남구 신흥개발 지역에서는 유흥 협력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예전에 영세한 그룹이었던 조폭 세력이 기업형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민생 치안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마약, 인신매매 등의 또 다른 사회문제 대두되었다. 

 

1990년 노태우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끔찍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1990년 10월 노태우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리고 1989년 국민생활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조폭 검거 작전이 실시되었었다. 그 결과 전국 육 대 지검에 강력부가 신설되면서 더욱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조폭 수사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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