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에서는 하층민 출신으로 역사상 가장 출세한 인물로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이전에 천하를 통일을 꿈꾼 오다 노부나가,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인물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통일 직후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를 견제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에도로 쫓아낸다. 1590년 오다 노부나가도 이루지 못했던 전국 통일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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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야 이에야스 성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쫓겨날 당시에 에도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늪지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버려진 에도(도쿄) 땅을 농지로 개발하여 에도는 발전해 나갔고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다음으로 부유한 영주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야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본거지 오사카에 엄청나게 큰 성을 짓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하면서 스스로 관백의 자리에 오른다. 관백이란 천황을 대신해 정무를 총괄하는 관직으로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한 출신 성분으로 인해 일본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통치자인 쇼균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관백이 된 후 오사카를 통한 새 목표를 제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다.
정명가도 통보
이런 도요토미의 야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 1590년이었고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통해 정명가도 내용을 조선에 보낸다.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라는 내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후 영주들을 달래 줄 땅이 필요했고 전쟁을 통해 명나라를 차지해 동아시아이 해상 거점을 통한 지배를 꿈꿨던 것이다.
전쟁 준비
그리고 명나라 황제 만력제부터 내부적으로 무너시기 시작했다. 결국 명나라 황제의 무능함과 오랜 기간 평화가 이어지고 있던 조선의 방심 시기에 일본은 손쉽게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준비를 위해 총 1천여 척의 병선을 확보, 각 영지에서 걷은 세금으로 유럽산 화승총, 실탄, 화약등을 구매했다. 화승총은 과거보다 유효 사거리 약 100~200m 로 성능이 좋아졌고 더 높은 명중률을 가지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쟁 참전 거부
이때 도쿠가와의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일본 관동지방의 반란 진압과 지배를 핑계로 참전을 거부했다. 그래서 도쿠가와의 핑계를 받아들여 군사지원을 포기하고 1592년 5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 발발
약 20만명의 육군과 수군을 태운 일본 군선과 함께 부산에 상륙하여 하루만에 부산을 함락, 한달 안에 한성(수도 서울)을 점령한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함경도까지 점령하게 이른다. 당시 왕이던 선조는 조선와 명의 경계인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선조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코, 귀 무덤
임진왜란 초기 화승총에 대한 정보조차 부족했던 조선은 연패를 당하게 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조선인을 벤 숫자에 따라 포상을 공언한다. 일본군은 처음에 머리를 베어 갔지만 부피가 크고 무거워 머리 대신에 귀를 자르기 시작했고 귀는 두개여서 전과를 부풀릴수 있어서 귀 대신 사람에게 하나 밖에 없는 코를 베기를 한 것이다. 이렇게 가져간 코는 소금을 담은 독에 실려 교토로 순회했다.
이런 무덤이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여기에 묻힌 코와 귀만 해도 3만여 개 10만여개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혹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전세 역전 요소 2가지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세를 두번에 걸쳐 조금씩 바뀌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은 옥포 해전 을 시작으로 일본 해군을 격파하고 시작해 연전연승을 올리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었고 일본은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막혀 빠른 조선 정복에 실패하게 되었다. 또 다른 변수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다.
명나라 파병
명나라의 만력제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10만여 대군을 파병하고 의주-평양-충주-울산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 명나라 군대에 일본을 떨게한 해귀가 등장한다. 이들은 포르투갈 용병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당시 중국 명나라는 포르투갈 노예 용병을 사서 부렸다.
결국 일본의 정면가도 작전은 실패로 끝이 난다. 일본은 후퇴를 하게 되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 내부에도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먼저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군대와 문자를 내줬던 영주들은 얻을 것이 없는 전쟁에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고 자신의 군대는 참전시키기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금의 도쿄를 포함 관동지역에서 힘을 길러갔다. 그리고 이때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건강도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다.
조선인 노예 무역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 자금을 얻기 위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노예무역까지 하기 시작한다. 조선인을 일본과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바로 조선 땅에서 대항해시대 노예무역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화승총과 비단 등을 얻기 위해 조선인을 무작위로 납치해 팔아버렸고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만 약 10만여명에 달했다.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은 마카오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을 서양으로 팔아넘겼다.
정유재란
일본과 명나라는 길어지는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강화 협상을 했으나 강화조건이 너무 달라 1597년 협상 결렬을 알리면서 조선에 2차 파병 군대를 보낸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은 1592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선에도 일본의 화승총을 본뜬 화승총이 보급되어 있었고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 명나라 군대의 합세로 고전을 했다. 그런 일본이 1598년 돌연 철수를 해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이렇게 드디어 7년간의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
임진왜란 후 상황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망직전 5명의 원로에게 자신의 아들의 안위와 보호를 부탁하는 유언을 했고 5명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있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제패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주들도 도쿠가와의 편에 섰고 반 도쿠가와 세력인 이시다 미쓰나라 세력이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인다.
세키가하라 지역은 고대부터 군사 교통의 요충지로 유명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원지대였다. 이렇게 일본을 건 최후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야의 완벽한 승리를 하면서 1603년 도쿠가와 막부를 열고 쇼균으로 즉위하면서 에도 막부의 시작을 알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편에 섰던 영주의 토지를 몰수하거나 먼곳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세력을 애도 를 중심으로 재구성하 며 권력을 집중시켰다. 도요토미 가문은 전투에서 진 후 여러 영주 중 하나로 전락, 1614년 도쿠가와 20만 군대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아들)를 공격하며 오사카성이 함락되며 도쿠가와 히데요시의 가문은 사라진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과 내전으로 지친 민심을 수습하고 1603년 에도 막부시대에 들어서면서 침략 전쟁은 멈추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요시다 쇼인 정한론, 존왕양이 조선 침략 발상의 근간 (미국 따라한 죄?!)[벌거벗은 세계사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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