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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이리역 폭발사고 (=익산역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by 365 ^^ 2021. 7. 20.

현재 익산이라 불리는 곳은  옛날에는 도시 지명 자체가 익산이 아니고 이리였다.

 

1977년 11월 9일 이리역 화약 열차 폭발사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던 이리역 화약 열차 폭발사고로 이리 시내는 폐허가 되었다. 1977년 11월 화약류를 실은 한 열차가 출발한다. 그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가 22톤 그리고 초산암모니아 5톤(화약의 원료로 쓰이는 폭발성 물질) 뇌관(화약을 점화하는데 쓰는 발화장치)가 1톤으로 폭탄에 필요한 모든것이 실린 폭발물 총 30톤을 싣고 인천에서 출발해 광주로 가고 있는 중이였다. 

 

폭발의 위력을 알수 있는 구덩이가 생겼다.

 

사고 사망자 및 피해

이 사건으로 59명 사망 185명 중상, 가옥이 7880여 채가 파손, 이재민이 약 7800명, 집을 잃은 시민들은 추운 겨울에 천막촌에서 보내야 했다. 

 

 

인근 지역 4km 이내 건물 9530여 채가 파손, 열차의 파편이 날라가 약 61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고 전주와 논산에서까지 진동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면서 정전이 되고 시내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엄청난 폭발음까지 들리면서 시민들은 전쟁인 줄 알고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로 폭격이 있는지 확인할 정도였다. 

 

이리역에서 700미터 떨어진 민가로 10톤짜리 기관차 본체가 날아가서 떨어졌다.

 

이리역 폭발 사고 원인

 

그전에도 화약을 운송하는 열차는 많았지만 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지 조사를 했더니 위험물 수송수칙을 전혀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 위반 수칙 1. 뇌관과 폭약은 동시에 운반 금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뇌관1톤을 함께 운반)
  • 위반 수칙 2. 화약류 취급면허 소지자 탑승( 화약류 취급지식이 없는 호송직원 1명 만 30톤이 넘는 화약 물질을 관리했던 것) 
  • 위반 수칙 3. 중간에 정차하지 않고 목적지로 직행 ( 당시 한국화약 회사에서 보낸 폭발물이었는데 화약류를 실은 열차의 경우 이리역에 정차를 했던 것이다.)    
  • 위반 수칙 4. 급행료 요구

-> 당시 관행적으로 역마다 급행료(일을 빨리 처리해달라고 비공식적으로 담당자에게 건네는 돈) 를 요구했었는데 돈놨이 만족스러우면 열차를 보내주고 만족스럽지 않으면 열차는 정지시켜놨던 뇌물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열차의 호송직원 신 모씨는 두 차례 담당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열차를 20시간 동안 열차를 잡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오랜시간 잡혀있자 신모 씨는 열차를 떠나 술을 마시고 다시 열차로 돌아왔고 밤이 되고 어두워지자 양초를 켠다.  심지어 양초를 화약 상자 위에 놓고 잠이 들었다. 깨고 보니 화물칸 속 다른 물건들에 먼저 불이 붙고 혼자서 불을 끄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밖으로 나와 불이야 소리 지르고 그대로 도주해버린다.

 

 

마침 현장에 있던 안전관리 담당 검수원 7명이 불을 끄려고 봤더니 열차에 다이너마이트로 꽉 차있는것을 확인하고 모래를 던저 끄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폭발하고 불과 연기가 가득하고 철로는 끊어저 버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철도직원 송석준 역무원이 폭발과 함께 몸이 날라가 정신을 잃었다가 깨고보니 사방에 폭발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시각 600명을 실은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화재사실을 알리기 위해 1KM를 뛰었다. 다행히 열차를 만나게 되어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호송직원 신 모씨는 징역 10년 선고받았고 급행료를 요구한 직원은 징역8개월, 한국화약 기업은 민간과 국가시설에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90억을 보상한다.

 

배상과 보상의 차이점: 배상(위법할때 사법적 책임을 지는것) 보상(적법하지만 스스로 증여하는 것)

 

이리역 폭발 사고 이후 위험물 점검이 철저해졌고 위험폭발물 취급 업소는 사람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이전했다. 

 

 


 

이때 하춘하 당시 톱스타가 이리역 인근 극장에서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가수와 무명 MC가 함께 공연)

이리역과 거리는 단 500m 거리였던 극장은 폭발로 무너지고 화재가 났고 하춘화씨는 정신을 잃었다. 아수라장이 된 극장에서 당시MC 이주일씨가 실신한 하춘화씨를 업고 밖으로 탈출했다.  당시 두개골이 함몰됐던 고 이주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하춘하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하춘화의 소개로 서울 중앙 무대에 서게 되면서 코미디 황제 이주일이 탄생한다. 

 

 

이리역 추모비는 역사 한켠에 보이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아타까움을 남겼다. 이런 추모비는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자꾸 되새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제대로 기억해야되는 사회적 합의가 미흡하다. 이런 사고를 덮어서 묻어버리는 것이 아닌 공론화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알쓸범잡 9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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