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2회]
오늘의 탐사지: 명동성당
주제: 친일파 탄생 배경
친일파는 어떻게 탄생했나?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무력을 앞세운 10년 동안 무단 통치를 했던 일본이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 운동으로 인해 전 세계가 주목하게 되자 통치 방식을 문화 통치로 바꾸기로 한다. 그때 일본 3대 총독 사이토마 마코토는 부임하는 당일 날 강우규 의사에 의해 총독 암살 시도가 이루어졌고 강우규 의사 의거로 인해 암살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일제의 편으로 만드는 등 친일파를 육성하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시작한다.
문화 통치의 내용
그래서 1920년대 친일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친일파 유형
매국형 친일파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 당한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고종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나라를 팔아넘겼던 대신들
을사오적
정미칠적
2년 후 정미 7조약 1907년 한 일신협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노 7인
경술국적
그로부터 3년후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노 8인
권력부합형 친일파
사이토 총독의 문화 통치가 시작되자 친일파가 된 사람들로 주로 별절한 지식인들이 이에 해당된다.
전쟁 협력 형 친일파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했던 친일파들로 일본의 중국 침략 이후 전쟁에 협력한 자들로 일제의 군수 산업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한 문화계 인사들
친일파 이완용 (친미->친러>친일)
어린 시절 이완용
6살에 천자문을 마스터하고 7살에 <효경><소학>등을 통달하는 등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던 이완용은 과거에 급제 후 공무원 자격으로 학교에 입학을 한다.(육영공원).
미국인 선교사에게 신학문을 습득하면서 근대적 교육 제도에 매료되고 넉 달 만에 주미공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미국의 선진 문물을 접한 후 30대 중반에 귀국 고종의 친애를 받았다.
세월이 흘러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시키고 아관파천의 성공 후 정계에서 급부상 한다. 그런데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로 잽싸게 친일파로 변절한다.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에 최선을 다해 충성한다.
이완용이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했던 친일 행동들
조선친일귀족들
친일의 길을 걸은 후 일본에게 많은 보상을 받은 친일파들에게 일본은 조선 귀족령을 선포하고 조선 귀족이라는 특수 계급의 작위를 받고 나라를 판 대가로 친일파들은 호사를 누린다.
강제 병합 과정의 공로로 조선인 수작자는 76명이 됐고 그 전에 작위를 습작 받은 후손까지 합치면 약150명 정도로 일왕에게 작위를 받고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 조선친일귀족들이었다.
조선 귀족의 혜택은?
후세에까지 보장이 되는 작위 세습의 권리를 보장하며 자손들은 최고의 명문 학교에 무 시험으로 입학이 가능했고 경제적 지위도 보장이 되었다. 친일 행적을 더 많이 할 수록 더 많은 호사들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완용 그는 얼마나 많은 부를 누렸을까?
그 당시 경성 최고의 현금 부자가 된 이완용 현금 자산만 지금 가치로 약 600억 원이 넘는 수준이었다. 땅은 여의도 면적의 약 8배를 소유했다.
광복 전에 땅의 98%를 팔아 치워 현금화를 했기 때문에 재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1992년 이완용의 후손들이 서울 북 아현동에 있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고 그 땅을 팔아 30억 원에 팔고 캐나다로 이주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완용 땅 일부도 국가가 환수한 상태 환수한 땅은 약 3,300평정도인데 이것은 이완용 땅 전체의 0.05%로 극히 일부 이완용의 후손까지도 반성과 부끄러움이 없는 노릇이라니
이재명 의사 의거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직후 이완용의 명동성당 방문 소식을 입수한 이재명은 김구를 찾아가 이완용 척살 계획을 알리지만 김구는 21살이었던 목숨을 바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인 이재명의 계획을 반대 한다.
1909년 12월 22일 벨기에 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나온 이완용을 인력거를 타려는 그를 그대로 급습해 인완용은 쓰러지고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그러나 이완용은 죽지 않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은 인물이 된다. 그렇게 매국노 이완용은 살아남게 되고 이재명 의사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남긴 말이 있다.
사형선고 받고 남긴 말 (이재명의 유언)
이완용의 최후
1926년 2월12일 사망한 이완용의 장례식이 성대하기 진행되었다. 사이토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했고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했던 이완용의 장례식이었다.
죽기 전에 이완용은 자신의 묫자리를 미리 알아보고 다녔는데 사후를 대비해 최고의 명당 자리를 찾고 또한 산세가 험하고 깊어 사람이 찾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 자신의 묘를 훼손할까 두려웠던 이완용은 전북 익산시 낭산의 명당 자리를 차지했고 이를 헷걸리게 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여러 개의 위장 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완용 묘를 찾아 낸 주민들은 찾아가 무덤에 총을 쏘고 마구 파헤쳐 엉망진창 훼손이 되어 결국 유족들이 화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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