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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십자군 전쟁 원인 , 배경 (2차~8차 ) 133-2

by 365 ^^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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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글] 1차 십자군 원정 : 마라 대학살, 롱기누스 창, (탬플, 튜턴, 성요한) 기사단 탄생 .. 133-1

 

1차 십자군 전쟁 - 예루살렘 탈환

2차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이슬람에게 빼앗김 

3차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순례 가능해짐 

4차 십자군 전쟁 - 기독교 국가만 공격 

5차 십자군 전쟁 -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슬람 세력들은 처음에 그 전에도 이곳에 강도단은 많았기때문에 잠시있다가 십자군들이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이 나라를 세우고 땅을 점령하자 이에 분노한다. 그 결과 1144년 이슬람 세력은 에데사를 탈환하고 다른 점령지도 되찾고자 했다.  

 

 

 

2차 십자군 전쟁 

에데사가 무너지면 나머지 왕국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1147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예루살렘은 십자군을 조직해 전쟁에 나선다. 그렇게 제 2차 (십자군 전쟁 1147년~1148 년) 발발한다.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은 소아시아를 횡단하며 거의 몰살당했고 프랑스 군대는 연안지대를 따라오다가 게릴라 부대를 이끄는 이슬람부대에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 결과 제 2차 십자군 전쟁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했다. 그 결과 이슬람 세력 안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용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살라딘

 

그 중에 살라딘은 이슬람의 장군으로 관대한 성격의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살라딘의 특기는 무기 개량이었다.

그가 개량한 무기 중에 그리스의 불이 있는데 물 속에서도 타는 무기여서 불이 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살라딘은 이슬람의 기술과 문화를 전쟁에 활용했다. 1174년 이집트 통치권을 가진 살라딘은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예루살렘 주변과 다마스쿠스 주변을 모두 차지했고 트리폴리의 십자군 영역만 빼고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살라딘의 영토

 

제 3차 십자군 전쟁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1187년에 1만 2천병의 기병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예루살렘을 뺏긴 그레고리오 8세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프랑스에 십자군 파병을 요청한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 플리프 2세, 리처드 1세가 파병을 한다. 

 

 

*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삶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다. 그가 얼마나 용맹했는지 그가 사자의 심장을 가진 듯했다고 해서 사자심왕  Lion Heart 라고 불렸다. 심지어 시자심왕 별명은 이슬람인이 지어줬을 정도였다. 

 

1188년 세 인물을 주축으로 원정군이 조직되었고 제 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 나라의 왕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고 가장 먼저 원정길에 올랐던 프리드리히 1세는 강물에 빠져 사망하게 된다.  황제를 잃은 군대는 철수할수 밖에 없다. 

 

 

프랑스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 리처드 1세는 이슬람 세력의 아크레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전쟁 중인 세력과 합류하여 압승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십자군의 승리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국왕은 십자군 원정을 오기 전부터 서로 앙숙이였고 프랑스 필리프 2세는 전쟁에 승리했다며 조기 철수를 한 것이다. 남은 리처드 1세는 여러 부대를 지휘할수 있는 탁월한 왕이였으나 이미 귀국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에게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십자군 점령 지역을 모두 반환하는 대신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가받았다. 리처드 1세는 런던으로 귀국하고 2번째 대관식을 치른 후 동생을 공식적으로 용서했다.  이후 약 26년간 평화협정으로 안전한 예루살렘 순례가 가능했다. 

 

4차 십자군 전쟁 

4차는 가장 야만적이고 수치스러웠던 전쟁으로 1202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기로 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전쟁 시기 36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이 되었다.  젊은 교황에게는 황제는 교황보다 아래있다고 생각하고 교황으로서의 권력을 보여주려했다.  신의 대리자로써 국가의 법률과 명령을 내리는 신전 정치를 실현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정정치를 실현할 첫걸음이 예루살렘 탈환이었다. 1193년 살라딘의 사망 후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교황은 이때가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권 세력 모두를 동원해 가장 강력한 십자군을 만들고자 했다. 

 

그 동안의 경험상 십자군 원정은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왕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의 일부 영주들만 예루살렘 재탈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첫 번째 원정지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집트였다.  당시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점 이집트부터 공략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집트를 점령하게 되면 당시 부유했던 이집트의 전리품도 챙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원정길은 당시 프랑스 영주들에겐 충분한 배가 없었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한다.  베네치아의 최고 지도자 엔리코 단돌로는 프랑스 왕실 수입의 2배와  십자군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5:5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시간이 급했던 십자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병력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고 이에 베네치아에 빚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본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당시 베네치아에 눈에 가시같았던 자라를 공격하면 상환기간을 늘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십자군은 자라가 같은 기독교 국가여서 꺼려졌으나 이때는 이미 본연의 목적을 잃은 상태라 자라 공격을 수락한다. 

 

자라 공성전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은 자라를 점령해버렸고  자란 시민들은 사절단을 보내 평화협정을 원했으나 그들은 받아들이 않았다. 결국 자라는 일주일만에 항복을 했고 십자군은 성안의 귀중품을 약탈하고 값어치 없는 것들은 모두 파괴를 해버렸다. 그리고 약탈품은 베네치아와 나눠가졌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교황은 십자군과 베네치아에 파문을 내렸다.  그러나 십자군이 교황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용서를 구하게 되니 교황은 이들의 파문을 철회한다. 교황 또한 예루살렘 탈환에만 몰두해 있었고 교황의 욕심 어린 선택이 불행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십자군에게 또 다른 기독교 국가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제안의 인물은 비잔티움 제국 전 황태자 알렉시오스 4세였다. 비잔티움의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4세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가 형제의 쿠테타로 폐위가 된다. 이에 알렉시오스 4세는 추방되었고 감옥에 가둬버리지만 도망쳐서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이 황위를 되찾게 해준다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성지에 기사를 내어주고 은화 20만 쾰른마르크(현재 가치 약 5000억 원)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황위를 되찾아주었으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킨다. 이에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을 지킬수 없었고 결국 1204년 4월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총공격한다. 공격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비잔티움 제국은 항복을 선언한다. 

 

십자군은 또한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방탕, 매춘, 약탈을 했는데 이때 뺏은 전리품 중 현재 성 마르코 성당에 있는 것이 많다. 

 

네 마리의 청동 말, 제단 장식 팔라도르 속 금판과 에메랄드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이집트는 안중에 없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십자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십자군은 결국 예루살렘은 가지않고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라틴제국을 건설하고 약탈을 계속했다. 그 결과 동방 교회에 대한 불신이 커지며 동서 교회의 분열이 가속화 되었다. 이렇게 4차 전쟁은 기독교인들만 공격하는 십자군 전쟁은 처참한 막을 내렸다. 

 

제 4차 십자군 전쟁 후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점령 후 제국의 3/8 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해상강국으로 떠오른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1217년 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4차례나 계속되었다. 

 

 

5차~8차 십자군 전쟁 

5차 전쟁때 성직자 프란치스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당시 이슬람 지도자를 찾아가 설득했다. 이에 이슬람 지도자는 그를 예루살렘 성묘교회에 가서 선교를 하도록 허락한다. 이때부터 700년 동안 지금도 그의 뜻을 받아서 프란치스코회(탁발수도회) 가 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프란치스코회

 

약 200년간의 전쟁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완전히 막을 내린다. 십자군 전쟁이후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해버렸고 왕권이 강화되고 상인들의 권위 또한 상승하였다. 그 이후 유럽에는 기근과 페스트가 휩쓸며 유럽의 1/3 의 인구가 사망한다 .이후 백년전쟁이 끝나던 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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