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에 최악의 조폭 범죄가 일어난다. 6명의 검사로 부터 한꺼번에 사형을 구형당하는 전대미문의 서진룸사롱 살인사건으로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수사전담반이 사건 수사를 총괄 진행하며 조폭 수사의 본보기가 된 사건이다. 범죄단체조직죄를 만들어 이후 형사사법에도 큰 영향을 준다.
대형 룸사롱 일반 대중에게 개방된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흉기를 사용한 끔찍한 범행이었다. 사건이 알려진건 광복절 아침이었다. 평화로운 아침에 이런 끔찍한 사건은 충격에 가까워서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1986년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정치경쟁이 문화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어난 배경
룸살롱은 방이 있는 유흥업소를 의미하는데 1980년년대 당시 유흥업소의 흔한 상호가 00 회관이었다. 지금도 성인 나이트클럽 이름은 00관으로 불리는것도 과거의 흔적인 것이다.
이 사건의 주체는 가해조직 진석이파 VS 피해 조직 맘보파이다. 광복절 하루전 1986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사면 시행이 있었다. 이때 맘보파의 핵심 조직원 1명이 석방되었고 출소 축하를 위해 서진회관을 찾은 피해 조직 맘보파 조직원들은 17호실에 있었고 16실, 20호실에 진석이파 조직원들이 나누어져 들어와 있었다. 그러다가 두 조직원들이 복도에서 우연치 않게 충돌하게 된다. 그러다가 진석인파의 한명이 맘보파 조직원 한 명을 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바로 진석이파 행동 대장 역시 칼을 사용해 다른 한명을 찌르게 시작했다.
그 사이에 3명은 룸살롱 밖으로 피신을 하고 나머지 맘보파 조직원 중 두명은 십칠호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니 가해조직 진석이파가 역기, 쇠파이프 등으로 잠긴 문을 부수기 시작한다 . 그리고 맘보파 조직원 2명은 17호실에서 살해당한다.
진석이파의 조직원들은 잦은 폭력 사태를 겪으면서 평소에 흉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이들 두 조폭들은 주로 20대 초중반으로 구성되어 그렇게 큰 조직은 아니였고 피해조직 맘보파는 7명이였는데 그냥 술을 먹으러 왔기 때문에 무기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가해 조직 진석이 파의 잔인하고 대담한 사례는 맞지만 계획범죄가 아닌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았다. 서진룸사롱사건이 발생한 5일만에 도주했던 주범들이 전북 임실에서 검거됐지만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과 반성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건 이후 모든 언론과 국민의 관심 속에 그들은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이들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전북 임실을 한 저수지 인근에 숨어있었고 일부 조직원들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시간차를 두고 현장에 없던 조직원들을 위장 자수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초기 수사 과정에서 상당한 수사에 혼동을 유발시켰다. 심지어는 범행 사실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려고도 했다.
또 다른 피해자
이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다. 바로 대한유도학교이다. 이유는 진석이파 조직원 12명 중 10명이 대한유도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학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쏟아졌고 깡패 양성소라는 오명까지 얻게 되면서 학교이름까지 바꾸게 된다.
사건의 영향
영화속 범죄 장면들의 유혈이 낭자한 조폭 씬들은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이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에 3S 정책으로 자극적인 에로영화가 양산되었는데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이후부터는 폭력 수위가 높은 조폭 영화가 유행했다.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이전의 조폭들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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