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쟁탈전(the 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불릴 만큼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지배에 경쟁적이었다. 모든 것이 풍부한 아프리카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 유럽이 취했던 방법이 바로 ‘타자화’ 전략이었다.
타자화의 의미/뜻
나와 다른 인종의 이질적인 면을 부각해 열등하게 보이게 하는 전략이다.
이 타자화 전략을 이용해 아프리카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작업을 유럽 열강들은 수행했다. 대륙적인 가스 라이팅 작업과 같은 것이다. 유럽은 문학, 의학, 과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을 총출동해 이 작업을 수행했다.
철학에서의 타자화
철학자 칸트는 오직 유럽인은 자연상태를 극복한 사람이라 지칭하며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흑인을 이성을 개발하지 못한 야만인으로 차별했던 유럽인들이다. 아프리카 인을 유럽인의 기준으로 철학적으로 타자화 한 것이다.
ex) 대 문호 셰익스피어 또한 아프리카 인뿐만 아니라 백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종에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인종주의가 드러난 작품으로 ‘태풍’ 이 있다.
이야기는 백인 프로스페로가 동생의 반란으로 탈출하다가 태풍을 만나 무인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유색인종을 표현한 그림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원주민을 만나 그의 이름을 ‘칼리반’이라 지어준다. 식인 행위를 뜻하는 카니발(carnival)에서 차용,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을 통해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인류학의 타자화
외모에서 느껴지는 차이점을 이용해 신체적 조건으로 우열을 가리는 19세기 인류학적 타자화를 1684년 프랑수아 베르니에 의사가 처음으로 인종 분류를 시도하면서였다.
일본의 타자화 문화통치의 예
※ 대표적 ‘타자화’로 인한 희생양 '사라 바트만'
1789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라 바트만’ 은 작은 키에 큰 엉덩이가 특징인 ‘코이산족’ 여성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코이산족의 딸이였으나 아버지가 사라 바트만의 약혼식을 거행하던 중 백인 정찰대의 총에 맞아 약혼자와 아버지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 바트만을 케이프타운으로 끌고 가 온갖 노역을 시켰다. 이때 군의관이 '코이카족'의 특이한 신체를 유럽에 전시하면 돈이 될 것이라 판단해서 런던 무대에 그녀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영국 대중문화에서 '인종 전시'가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된다.
그 후에 프랑스로 가게 된 그녀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동물 등을 전시하는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한 것이다) 이렇게 노역을 하다가 사라 바트만은 결국 5년 만에 사망하지만 그녀의 끔찍한 비극은 그 후에도 있었다.
프랑스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가 아프리카 인종은 뇌가 작아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못하다는 등의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사라 바트만의 시신을 해부해 생식기와 뇌를 적출한다. 그러나 다른 인종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 사라 바트만의 유해는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 187년 동안 전시되었다. 그 후 1994년 만델라 정권이 들어선 후 우선적으로 진행한 국책사업이 바로 프랑스에 있는 사라 바트만의 유해를 고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유해 반환요청을 8년간의 외교전을 통해 수행했고 프랑스는 순순히 돌려주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입장은 '문화재는 헌법을 바꾸지 않는 한 돌려줄 수 없다 '는 입장이었다. 그때까지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사라 바트만처럼 코이산족 후손인 시인 ‘다이아나 퍼러스’가 프랑스 상원의원들에게 들려준다.
이 시에 감동받아 만장일치로 유해반환이 결정되었고 사라 바트만의 유해는 프랑스에서 2002년 5월 20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더욱 쉽게 통치하기 위한 전략으로 타자화를 했고 철학, 문학, 과학 등 전방위적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식민 지배에 이용했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21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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