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밀레 박수근 화백은 워낙 유명한 화가이고 교과서에도 나와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경매에 나와서 낙찰가가 45억 2000만원이었고 당시 경매가 정점을 찍은 후 8년간 깨지지 않는 금액이었다.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 미술관은 박수근 화백의 생가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생가는 6.25때 소실되었고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 마을리에 위치해 있다. 생전에미술관 근처에서 스케치북 들고 실제로 그림을 그렸다. 강원도 양구는 돌이 많은 곳으로 박수근 화백의 호도 미석(아름다운 돌)이다.
박수근 화백 마티에르
박수근 화백의 그림 질감은 화강암 같은 거친 느낌인데 전문용어로는 프랑스어로 마티에르이다. 마티에르 화법으로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를 담은 박수근 화백이다.
마티에르는 캔버스에 물감을 층층이 바르고 물감을 말린다. 이후에 물감을 긁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또 다시 물감을 바르고 말린다. 그리고 또 긁어낸다.
박수근 화백은 7살때 아버지의 광산사업 실패로 그림을 그릴 형편이 되지 못했으나 선생님과 주변의 사람들이 박수근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감, 종이등 그림을 그릴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준 덕분에 그림을 지속할수 있었다. 12살때 박수근 화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밀레와 박수근 화가의 공통점은 둘다 농촌 출신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모두 서민을 그렸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 일상의 삶을 투박하지만 따뜻하게 그려낸 두 화가이다.
박수근 화백이 정식으로 화가로 등용된 시점은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32년 18세의 나이에 첫 입선을 하게 되면서였다. 제목은 봄이 오다이나 그림은 눈이 쌓인 모습이다.
당시 화가들은 이 대회를 통해 계속 입선을 해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였으나 그 이후는 계속 낙선을 하게 되고 낙선의 슬픔이 가시도 전에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1935년에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암판정이후 살림을 장남인 박수근이 도맡하서 하게 된다. 그렇게 힘든 10대 시절을 보냈던 박수근 화백이다. 그 과정에서 가세가 너무 기울어 빚을 많이 지게 되었고 살던 집 마저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려 4년만에 1936년 22살의 나이에 두 번째 입선을 하게 된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얻게 된 재입선의 영광이다.
박수근 미술관 첫 원작품 <굴비>
1956년에 생긴 반도 화랑을 통해 박수근 화백이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자주 들리던 곳이라 그곳에서 일하던 미스 박이라는 직원이 있었다. 미스 박에게 시집갈때 그림 하나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박수근은 미스 박이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내 김복순 여사가 이 약속을 지킨 것이다. 미스 박이 결혼할때 아내가 보자기에 싸서 가져왔던 작품이 굴비였다. 이후 미스 박은 사정이 있어 이 작품을 팔았고 그 당시 <굴비> 의 경매가는 2만 5천원에 팔았는데 미안한 마음에 다시 되사게 되었고 그때 <굴비> 그림 가격은 2억 5천만원이었다.
그 이후 2002년 박수근미술관이 개관했는데 당시 미술관에 원작 소장품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을 알게 된 미스 박이 <굴비> 작품을 기증하면서 박수근 미술관의 첫 원작품이 되었다. 미스 박은 현재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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