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의 역사
조선시대
지금의 떡볶이는 국민 간식으로 길거리 음식 서민 음식이지만 사실 떡볶이는 궁궐 음식에서 출발한다. 임금이나 양반들이 먹던 고급 요리로 조선 시대에 간장을 기반으로 소고기 채소 가래떡을 길게 썰어 넣은 형태로 궁중 떡볶기라고 불렀다.
현대의 떡 탕의 형태인 떡볶이는 조선 시대에 ,병자, 오병, 병탕으로 부르기도 했던 것으로 가래떡에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여 먹었던 음식으로 한 그릇으로 담아낸 떡국과 비슷한 병탕, 떡국의 변형 형태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장수한 왕으로도 알려졌는데 그의 장수의 비법 하나는 소식, 또한 입맛을 돋우기 위해 영조가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간장 떡볶이였고 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떡볶이를 좋아했다 했는데 치아가 좋지 않아 영조가 걱정했다는 기록이 승정원 일기에 있다.
옛날 왕실에서는 떡이라는 것은 간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남자들이 간식을 먹는 것은 체통없다고 생각해 남자들은 꺼려하고 여자들이 즐겨 먹은 기록이 있다.
1938년도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노래 중 오빠는 풍각쟁이야 라는 가사에 ~ 오빠는 불고기 떡볶이만 먹고 나는 오이하고 콩나물만 주고 ~ 불고기 떡보끼라는 내용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떡볶이는 대중적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이후)
밀가루 떡 등장
미국에서 들어온 싼 가격의 대량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쌀떡이 아닌 값싼 밀가루 떡볶이 떡을 만들었다. 또한 값싼 밀가루를 볶아서 고춧가루를 섞어 공장식 고추장이 나오면서 밀떡볶이와 고추장으로 원래 떡은 굵은 가래떡으로 오래 익혀야되기 때문에 1~2분이면 익는 얇은 밀가루 떡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간장 기름 떡볶이
전형적인 떡볶기는 팬에서 양념을 넣고 볶는 것을 떡볶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길거리에서 팔기 시작한 건 초창기 떡볶기의 흔적 재래 시장 일부에 남아있는 기름 떡볶이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이후 부터 통인시장, 옥인시장에 가면 번철에 밀떡을 간장에 볶아주는 간장 기름 떡볶기를 팔다가 60년대에 고춧가루가 대중화되면서 등장한 고춧가루 기름 떡볶이가 진정한 떡볶이 원형이다.
50~60년대 쌀이 귀했던 시기로 쌀로 술도 못 만들었던 시기로 절미 운동의 일환으로 부족한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혼분식을 장려한 국민 운동으로 명절에 떡 방앗간에서 떡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 (고추장 떡볶기)
현재의 빨간 고추장 떡볶이의 모든 기술들이 마복림 할머니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직후 54년에 마복림 할머니가 어느날 중국 음식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신장개업을 한 가게에서 가래떡을 줬고 그 떡을 먹다가 미끄러운 떡이 짜장면에 떨어졌고 우연히 춘장이 묻은 떡을 먹었더니 약간 느끼하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래서 마봉림 할머니가 춘장에 느끼함을 줄일 고추장을 조합해 떡볶이를 만들어 내서 연탄불에 여러가지 재료를 넣고 고추장에 범벅해 신당동에서 떡볶기를 팔기 시작했다. 68년 이후가 되면 전쟁을 치르고 먹고 사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매운맛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떡볶이의 대중화
떡볶기가 대중화된 시기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이다. 1970년대 후반 혼분식 장려운동의 여파로 밀가루 떡볶이가 대중화된다.
그때 마봉림 할머니의 떡은 밀떡이었다. 쌀이 귀했던 시절 혼분식 장려로 쌀떡 대신 밀떡이 등장하면서 밀떡+고추장 양념에 혼분식 장려 정책이 맞물려 떡볶이는 급속히 대중화 되었던 것이다.
70~80년대까지
즉석떡볶이, 신당동 떡볶이 타운 형성
1970년 말 LPG 의 보급과 함께 떡탕 형태의 떡볶기가 대중화가 된 즉석 떡볶이이다. 마복림 할머니 떡볶기를 시작으로 주위에 떡볶기집이 점점 늘어나면서 80년대 초반부터 신당동 떡볶기 타운이 형성되었다.
또한 이때 녹색 혁명의 목적으로 통일벼라고 해서 개발한 벼 품종으로 단위당 수확량이 많아 식량의 자급자족으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60% 상승해서 통일벼 생산 이후 활발히 쌀이 소모되면서 쌀 떡볶이도 대중화 단계로 들어선다.
신당동 DJ 분식집
신당동 떡볶기 집은 일곱 집이 모여서 만든 떡볶이 집인데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 집으로 손님이 몰리자 눈에 띄기 위해 DJ가 진행하는 콘셉의 떡볶기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70년대 중반에 생긴 음악 다방 문화는 고등학생은 출입 금지로 신당동 떡볶기 집에 고등학생들의 수요에 맞춰 탄생한 DJ 분식집이다.
*신당동 지명의 유래
신당동은 광희문 옆에 위치해 있는 동네인데 광희문은 옛날에 전쟁이 나면 시신들이 많이 나가는 문으로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시신이 나가는 곳이라 무당집이 많이 있었던 동네여서 신당이 모여있어서 신당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직도 신당동에는 무당집들이 많이 있다.
어묵의 역사
어묵 또한 역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때 돈 많은 사람들이 아주 고급 요리를 먹을때 진짜 생선 살만든 비싼 고급음식이었다. 그러나 광복되고 나서 운영하던 공장을 두고 일본인들이 떠나자 공장에 남은 직원들이 공장을 인수하여 우리나라 어묵의 역사가 시작된다.
생선살이 비싸서 광복 후 밀가루가 대량 보급되었고 자갈치 시장에서 저렴한 생선살에 밀가루를 섞어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을 한 것이 우리나라 어묵의 시초이다.
최근에는 치즈, 라면, 쫄면등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짜장 양념으로 만든 떡볶이등 종류도 다양해졌다.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일 수록 매운 음식이 많다. 학교 앞에 떡볶이 집이 많은 이유가 입시 스트레스가 많다는 이유일 수도 있다.
[출처 MBC 다큐 스페셜, 수요미식회, 떡볶이집 그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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