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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동의회를 만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무덤은 어디에 ㅠㅠ

by 365 ^^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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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3,14회 중]

 

연해주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 선생

최재형 선생 유일한 사진

임시정부의 김구가 있다면 연해주의 최재형 선생님이 있다.

 

어린 시절

1860년 8월 15일에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가난한 소작농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경원 군에서 살았는데 흉년으로 인한 기근을 피해 가족들은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주 후  지신허 마을에 정착한다. 둘째로 태어난 최재형은 형수가 심하게 구박을 했고 11살에 가출을 한다. 크라스키노에서 포시예트로 간다. 그곳에서 탈진한 최재형을 러시아 선장이 구조를 해 준다. 이 러시아 선장 부부는 최재형을 양아들을 삼는다. 그리고  이들은 최재형을 친자식보다 귀하게 키워 준다. 새 인생을 살게 된 최재형은 러시아 이름 '표트르 세묘노비치'로 불렸다. 

 

 

청년시절

새아버지를 따라 선원 생활하며 멋진 청년으로 커서 무역회사에 일하며 돈도 모으고 사업을 배우면서 성공한 사업가 청년으로 성장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어 다시 크라스키노(=연추)로 가서 그곳의 땅을 다 사버린다. 그때가 21살이었다. 러시아에서 그 때 마침  군사도로를 만들고 있었고 러시아 정부와  한인들 사이에 끈 역할을 하며 연해주 한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신분의 불평등을 싫어했다.  조선인들이 너무 존경하여 한인 집집마다 최재형 선생님 초상화가 있었을 정도였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이름 '표트르' 지만 한인들은 존경의 의미로 '페치카 최'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따뜻하게 해주는 난로라는 뜻이다. 러시아인으로 자라 조국에 대한 기억도 없을 텐데 자신이 태어난 고국은 일본에게 빼앗겼고 현재 고국 러시아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동의회

그래서 최재형 선생이 1908년 결성한 항일 의병 조직 단체가 동의회(의리로 뭉친 뜻을 모으는 단체)다. 동의회 설립을 주도했던 러시아 공사 이범진 등 러시아 항일세력을 집결하고 무장 통 쟁의 뜻을 펼쳤다.

 

동의회 구성원

 

회장: 이위종

평의원: 안중근

총재: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동의회 조직도

* 이범진: 거금의 독립 자금을 아들 이위종을 통해 전달하고 을사늑약 체결 후 나라가 어려워지자 1911년 본인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자결을 선택한 이범진이다. 

 

의병투쟁을 하니 총, 칼로는 한계가 느껴지며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32개의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이 힘썼다. 최재형 선생이 독립 지원금으로 바친 게 113만 5천 루블이었다. 이는 1년에 136억 원 정도의 소득이었다. 부와 명성을 본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모두 사용을 했다.

 

 

 

 

최재형 선생 고택 

 

최재형 고택 외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최재형 선생의 생가가 있다. 엄청난 재력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상했던 것과 달리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고택이다.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던 최재형 선생이다.

 

최재형 선생님의 집
최재형 고택 내부 현 박물관으로 꾸밈

 

최재형 선생님 집 내부와 실제 난로 (페치카) 복원 
최재형 선생님 집 내부
동의회 -뜻을 모은다
깨진 유리창 그대로 둠

 

최재형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 

 

최재형 선생은 마지막까지 이곳 자신의 고택에 가족들과 있었다. 1920년 4월 참변 때 자신의 집에서 잡혀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4월 참변 때 상황

1914년 러. 일 전쟁 10주년에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를 몰아내려 대한 광복군 등을 만들었지만 그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국이 된다. 그렇게 일본은 연해주를 드나들며 한인들과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권업회 해산 , 독립운동가들 추방. 활동 중지 등 연해주 독립운동의 암흑기였던 시기이다. 

   

그런데 1917년에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혁명이다.  그래서 재러 한인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인 적군이 1920년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본의 민간인을 학살하자(니항사건)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볼셰비키 세력을 지지했고 일본은 한인들에게 보복한 것이 신한촌을 습격해 한인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1920년 4월 참변이다. 이때 블라디 보스톡에서는 300여 명의 한인들을 학살을 하는데 한 건물에 사람을 가두고 불을 질러서 태워 죽이고 도망가면 총살했다.

 

4월 참변때 한인 학살 모습

 

최재형 선생 체포 당일 모습

그리고 우수리스크까지 옮겨 오게 되는데 1920년 4월 5일 최재형 선생은 가족들이 고초를 받을 것을 걱정해 도피하기를 거부하고 다음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간다.   

 

딸 최울가의 기록

4월4일 저녁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가족 모두가 놀라고 걱정했다. 거리는 이미 어두웠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체포해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거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 고 말햇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다. 그렇게 또한번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 아버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방 덧문을 열었다. 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하고 현관 계단으로 내달렸다. 거리로 나가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최재형 선생 총살

 

최재형 선생은 그렇게 체포되어  우수리스크 감옥에 끌려온 후 감옥 뒤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근거는 독립운동가 이인섭 선생이 남긴 수기에 있었다. 

 

 

 

우수리스크 감옥

증언자의 기록에 따르면 모진 고문 끝에 재판 없이 총살을 당했다. 유해를 땅에 묻는데 찾지 못하게 봉토도 없이 묻었다.  그렇게 당시 상황을 은폐. 왜곡하려 했던 일제다. 훗날 가족들이 유해를 돌려달라고 했으나 일본 측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거절했다. 지금도 어디에 유해가 있는지 모른다. 

 

이인섭 선생 수기만이 현재 유일한 추정 근거
2007년 4월 7일 87년 만에 길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최발렌틴 손자의 사진
우수리스크 감옥 뒤편 아무것도 없는 길

최재형 선생님 죽음 이후 가족들의 삶

이 끔찍한 광경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일본군이 어떻게 아버지를 고문하고 죽였는지 생각하면 너무나도 괴로웠다.  -딸 최올가의 증언 중-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맏이 역할을 해야 했고 우리는 배워야 했으며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딸 최올가의 증언 중-

 

 

 

헤이그 특사 이야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5년 11월 을사오적의 주도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니 고종은 일본의 불법 점령에 대한 부당함을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 헤이그 특사 파견의 정보를 준 것이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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