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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난중일기 내용, 의의 : 정유일기 속 명량대첩 기록 368

by 365 ^^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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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UNESCO Memory of the World) 으로 선정된 이유

 

훼손되거나 소멸할 위기에 처한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 이용하기 위해 선정하는 세계 기록 유산은 record 가 아닌 서술자의 감정이 담긴 기록 memory이다.  우리나라는 16개의 기록 유산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난중 일기또한 등재되어 있다.  1962년 국보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인물이 영국의 넬슨제독이 있다. 18~19세 넬슨 제독은 180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격파했던 인물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트라팔가르 광장에 약 50M 높이의 넬슨 탑도 세웠다.  

 

난중일기의 의의 

 

중요한 역사적 시기 이해에 도움되는 자료로 당시 일본이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침략전쟁, 조선, 명, 일본 3국이 참전한 아시아 최초의 세계대전인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난중일기는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당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을 기록한 안네의 일기를 통해 알수 있듯이 난중일기도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 준비과정 상황을 상세히 묘사되고 있고 난중일기를 통해 사람 이순신의 모습도 알수 있다. 

 

 

 

임진장초 
이순신 장군이 남긴 또 하나의 기록은 임진장초 국보 76호로 함께 지정된 것이 있다. 차이점은 난중일기는 하루의 일정과 공,사적 만남 등 개인적 일과 감정을 담고 있고 글씨체는 빠르게 흘려 쓴 초서체로 되어 있다.  임진장초는 국왕 선조에게 보고하기 위해 쓴 공식 문서이다. 

 



난중일기는 정조 19년에 간행한 이순신 전집 이순신의 행적, 일화, 인품, 전언 등을 망라한 책인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될때 편찬자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난중 일기이다.

 

을미일기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는 그해의 간지를 넣 임진, 계사, 갑오, 을미 , 병신, 정유, 무술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러나 1995년 친필 을미일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을미일기의 내용은 가장 많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정조시절 <이충무공전서> 편찬 시, 근거 자료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난중일기 내용

1592년 부터 1598년 눈을 감기 이틀 전까지 일기로 남긴 2539일간의 기록이다. 빨간색으로 칠한 부분이 이순신 장군이 일기를 쓴 기록이다.  또한 일기를 쓴 날 중 날씨를 쓰지 않은 날이 고작 42일 밖에 되지 않는다. 난중일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 자료이기도 하다. 특 해안지역의 날씨 변화를 아주 자세히 길고하고 있어서 난중일기를 통해 16세기 장마기간이 지금과 비슷함을 알수 있다. 또한 주로 밤에 찾아오는 게릴라성 폭우가 16세기에도 주로 오후 밤에 많이 내렸음을 알수 있다. 

 

1592년 6.11~8.23은 일기가 비어있는데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해전이 있던 시기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1594~1596년까지 기록이 거의 되어 있고 1595년은 20일을 제외하고 일기를 모든 날이 쓰셨다.  친필일기는 미발견 상태인데 어떻게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었으나 <이충무공전서> 편찬시 근거 자료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1597년 2월의 일기도 없는데 이때가 이순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해였다. 이순신이 출병 명령을 따르지 않아 대노한 선조가 명령 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파직 투옥시켰다.  4월 백의종군하여 난중일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그를 맞은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심은 일기 곳곳에 묻어난다. 

 

 

정유일기 내용

1597년 8월~10월은 일기를 하루에 두번썼다. 명량대첩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으로 7년의 기록 중 가장 자세히 기록된 명량대첩 당일일기이다.  두 권의 정유일기에 시간순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유일기 :&nbsp; 첫번째 권에는 정찰부대의 보고부터 전쟁의 승리까지 기록이 시간순으로 상세히 기록 , 두 번째 일기는 첫번째 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



명량대첩 
이순신 장군의 어록중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 신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 이다. 세계 해전사를 모두 찾아봐도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극적인 승리를 했던 것이 명량대첩이다.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해로 억울한 옥살이 후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이지만 그를 기다린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말년 

이순신 장군은 말년에 몸이 좋지 않았다. 난중일기에 몸이 불편하다는 기록은 90% 이상 된다. 이순신 장군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자한증 (식은땀)이 심했고 소음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내성적이고 세심한 성향으로 몸이 냉한 체질이었고 밤에는 토사곽란(구토,설사)가 심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처방받은 '온백원' 은 몸을 따듯하게 하는 약재로 천초초, 후박, 인삼, 파두상 등 약재를 꿀로 버무려 환으로 먹은 약이다. 

 

온백원: 천초초,후박,인삼,파두상 등 약재와 꿀을 버무려 환으로 먹는 약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술을 자주 즐겼다는 기록이 무려 90회 이상으로 많다. '과하주' 여름을 지나는 술이라는 의미로 달달한 과실주이다. 만취와 주취를 했다는 기록도 많다.  부하들과의 소통의 수단으로 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쟁을 일기에 남기지 못한 채 성웅으로 남았다.  1598년 명과의 밀약을 통해 탈출을 도모하고 있던 왜군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왜군이 명에 바친 물품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을 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임진왜란과 전쟁 목표가 달랐던 정유재란 은 조선 땅 침탈을 목표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었다.  위 내용의 1598년 11월 17일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일기이다. 그리고 이틀 뒤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이다.  왜선 500척 중 200여 척을 격파하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불과 50여척에 지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통해 스스로 단련하고 성장시켰고 위대한 인물로 거듭난 인물이다. 또 난중일기는 친구 유성룡의 징비록 처럼 미리 준비해서 후환을 없앤다처럼 후환을 경계하는 용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수 있어서 더욱 귀한 기록이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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