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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기황후가 몽골 원나라 멸망 원인이었다? (원 멸망 이유 및 몽골의 유산)

by 365 ^^ 2021. 10. 31.

몽골의 마지막 황후 기황후 

몽골 제국은 4개 울루스의 연맹 형태로 칭기스칸 후손의 연대감 일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이 되고 있었고 종주국인 카안 울루스에 기황후가 황후로 오른 인물이 기황후이다.

 

몽골의 4개 울루스 연맹 속 카안 울루스 (대원제국) 

 

기황후를 간택한 이는 원나라 순제이다.  1333년 순제가 즉위한 해  이때 황궁으로 들어올 때 고려인 환관의 추천으로 기황후가 황궁에 들어온다.  그리고 순제의 차 시중을 담담하기 시작했다. 

 

 

순제가 즉위 당시 10대 소년이었고 순제의 당시 상황은 주변 신료들이 무시할 정도로 권력이 약했다. 그래서 그 옆에서 궁녀 기씨가 그의 안식처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토곤 테무르 칸 순제에게는 3명의 황후가 있었다. 앞의 두 황후 소생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오직 마지막 기황후에게서만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원 순제

 

원나라의 멸망 원인이 기황후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몽골인들이 아닌 한족들이 한 말들인데 몽골 사학계에 대한 기황후의 평가는 대원제국 말기 권력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로 정국을 좀더 혼란하게 만든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기황후가 권력투쟁에 나선 이유는 고려 출신 혈통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기황후 실제 이야기 (역사왜곡, 실제사진,기황후 결말)

[KBS 역사스페셜 126회 리뷰, 이미지 드라마 기황후] 칭기즈칸의 제국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골(원나라)의 마지막 황후는 바로 고려인 기황후이다. 기황후에 대한 실제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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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제국의 멸망 원인 

 

▷황제 계승 원칙의 부재

혜종의 즉위년도는 1333년으로 1294년 1대 쿠빌라이 칸(세조) 사망하고 39년 동안 8명의 칸이 등장하고 있다. 평균 재위 기간이 5년미만인 것이다. 칸이 사망할때 암살되거나 독살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 쟁탈로 인해 복잡해진 계승문제는 황제 계승 원칙의 부재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 대원 제국이다. 

 

원라나 황제 계보/  기황후 앞 두번째 황후는 독살된다. 황실 내 독살은 흔한 일이었다. 

 

▷황태자 양위사건 

1356년 권신 카마를 앞세워 양위를 청한 기황후는 현 황제 순제를 태상황으로 요청하도록 한다.  이때 황태자의 나이 16세 , 원 순제의 나이는 36세였다. 이 사건은 기황후의 첫 번째 내선시도였다. 내선이란?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는 일을 말한다. 첫 번째 내선 시도 이후 카마는 처형이 된다. 그러나 기황후는 처벌을 받은 기록은 없다.

 

3년 뒤에 기황후의 두번째 내선시도를 한다 .이때는 순제가 화가 나서 기황후를 2달동안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두 달동안 소원하게 지냈으나 역시 기황후를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다. 

 

순제가 기황후를 제 1황후로 책봉한 이유

기황후는 제 2황후였는데 그리고 25년 뒤 제 1황후로 책봉된다. 순제는 37년 동안 몽골제국 황제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일반적으로 재위 기간이 길수록 강해지는 왕권인데 순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기황후의 힘이 자신의 힘이 될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으로 이에 기황후를 제 1황후로 승격시키고 기황후를 추출할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원나라의 권신의 득세

대원 순제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권신 바얀은 245자의 직감을 가지고 있을 만큼 원나라 권력의 중심이었다. 권력을 독식한 권신에 의해 국운이 쇠한 원나라는 태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원나라 권력의 대명사 바얀의 직함 /온갖 좋은 직위를 모두 때려 넣은 ...

 

권신 톡토의 등장

황제보다 큰 권력을 행사한 원 말기 킹 메이커로 권신 바얀 뿐만 아니라 톡토(바얀의 조카) 도 있었다. 톡토는 순제와 모의해 바얀을 축출한다. 그러면서 톡토는 순제 정치에 1인자로 등극하게 된다. 기 씨의 황후 등극을 결사 반대한 바얀과 달리 톡토는 공녀 기씨의 제 2황후 등극에 조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13년 후 아유시리다라의 황태자 책봉 논의있을때 톡토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때부터 기황후와 톡도의 갈등이 시작된다. 

 

 

황화 범람 및 전염병 

1330~1369년 사이 황하강 중상류에 제방이 7번이나 붕괴되어 범람해 주변의 마을이 초토화되었었다. 1351년 황하범람은 황하의 물길이 바뀔정도의 큰 범람으로 보수를 위해 백성 15만 명, 군대 2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동원된 인원이 한족 농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족 농민들의 반감이 자연 재해속에서 증폭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염병까지 창궐하게 된다. 이 전염병(흑사병)은 몽골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어 몽골인구의 1/3이 사망한다. 

 

 

▷홍건적의 난 

이로 인해 물자의 흐름 , 정보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를 14세기의 위기였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적개심이 커져갔고 드디어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의 난이 발생한다. 

 

홍건적의 난은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반란

 

홍건적 진압을 위해 권신 톡토를 직접 파견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조정에서는 기황후와 톡토 적대 세력 카마가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계책이 성공하게 되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던 톡토는 갑자기 파면된다. 톡토의 해임 후  일설에 의하면 800만 대군으로 추정되는 몽골군은 괴멸된다. 그 이후 홍건군(=홍건적)에 전혀 대응하지 못한다.   

 

톡토의 해임이 원나라의 큰 화가 되었던 것이다. 원의 쇠망은 톡토의 퇴출을 분기점으로 보고 있고 톡토의 퇴출에 원인은 기황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황후를 원의 쇠망원인이라고 책임을 씌우는 희생양을 찾은 것이다.

 

원사의 내용에는 

 

 

주원장의 등장

이렇게 홍건적이 세력을 키워갈 때 주원장 (명나라의 태조)이 등장한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인물)전쟁 중 혼건적 세력을 규합해 세력을 확장한다. 

 

공민왕VS 기황후

권신의 득세, 재난 기근, 민중 봉기등 원나라의 국운이 쇠락해지는 가운데 원 국운의 쇠락을 보여주는 대외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원나라 기황후와 고려의 공민왕은 갈등을 심화되고 있었다. 기황후가 득세하자 위세가 등등해진 기씨 가문, 특히 기황후의 오빠들 횡포가 극심했다. 

 

특히 기황후 오빠 기철은 공민왕에게 시를 지어 올릴때 자신을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다. (고려사 중)  또한 기원은 왕과 말을 탈때 왕의 뒤에서 타는 것이 아닌 왕과 나란히 말을 달렸고 1356년 궁에서 열린 잔치에서 기철을 포함한 친원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매복해있던 장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공민왕이 친원파를 제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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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의 원 압박

홍건적이 원을 뒤흔든 틈을 타 기황후 인척을 제거하니 기황후는 분노했고 복수를 결심한다. 기황후는 이에 고려 침공을 결심하고 8년간 준비를 한다. 이는 원나라가 전쟁을 준비하고 결행하는데 힘이 모자랐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최영과 이성계 장군이 이를 막았고 이로 인해 대원 제국의 국력이 속빈 강정이라는 것을 눈치 챈 주원장은 무서운 기세로 원을 압박해 들어간다. 

 

1368년 수도 대도를 떠나 북쪽으로 대피한 순제와 기황후는 1년 반정도의 도피 생활을 한다. 1370년 순제는 응창이라는 곳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당시 나이는 51세였다. 순제 사망 후 칸이 된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카안이 되었다. 

 

 

그리고 1378년 카안이 된 후 8년 만에 아유시리다라는 사망한다. 그렇다면 기황후의 행방은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기록이 있는데 황후는 고려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는 기록이다.

 

북원의 2대 황제 재위 1370~1378년 (기황후의 아들아유시리다라)

 

몽골 제국의 몰락

몽골제국은 4개의 울루스로 이루어져 있고 이제까지는 카안 울루스 (대원제국)의 멸명을 말한다. 나머지 3개의 울루스는 개별 역사를 지니고 있다. 훌레구 울루스와 차가타이 울루스는 대원은 카안 울루스보다 먼저 멸망했고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 지역인 주치 울루스는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이 등장하는 15C 중반에 해체된다. 그래서 몽골의 잔재가 가장 오랜 기간 남은 것은 러시아 이다.

 

 

원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 건국

그 후에 명나라가 중원에 들어선다. 그리고 북쪽으로 후퇴한 몽골인들은 계속해서 명과 대치상태로 간다. 그래서 15C 중반 토목의 변이 일어난다. 이는 몽골 오이라트족이 명 영종 황제를 포로로 잡은 사건이 발생한다. 명과 몽골의 대치는 우리나라 병자호란때 까지 이어진다.

 

청나라 홍타이지(청 제국의 초대 황제)

 

청나라 건국과 병자호란

병자호란때 쳐들어온 청나라 홍타이지(청 제국의 초대 황제)는 조선 침략 전에 몽골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국가를 유지하던 몽골 칸으로부터 대원전국 이름의 금도장을 획득하는데 칭기즈칸 대 제국의 옥새였고 홍타이지는 자신이 칭기즈칸의 정통성을 잇는 황제가 될 것 이라고 말하며 황제 즉위 후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한다. 이것을 주변 나라들은 모두 인정했으나 오직 조선만이 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병자호란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 뒤에는 18C 중앙아시아쪽에 최후의 유목 국가 준가르가 청에 점령당하며 유목 역사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준가르가 망한 그 지역이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다.

 

현제 중국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이 준가르 지역

 

 

신장 위구르 탄압 이유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

신장 위구르 역사 신장 위구르 지역은 청나라가 1884년 복속한 지역이다. 1911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이틈을 타서 신장 위구르 사람들이 독립 의지를 불태우며 1944~49년 분리독립 후 동투르키스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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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지속기간은? 

1206년몽골 울루스 건설~ 1388년 카안 울루스 멸망까지 182년으로 보고 있다. 

 

 

 

 

 

 

 

몽골의 유산 

몽골 제국이 멸망 후 유라시아 대륙에 등장한 몇 개의 거대 제국이 있다. 명(1368~1644) 중앙 아시아 티무르 제국(1370~1507), 중동의 오스만 제국(1299~1922), 북쪽의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제국 1283~1917), 인도의 무굴제국(1526~1857) 등이 넓은 제국들의 사라진 몽골 제국과 경쟁을 한다. 이전의 몽골 제국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영토 전쟁을 하면서 중앙 아시아는 커다란 전쟁터가 된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시초 

이로인해 새로운 환경을 만들지 못해 바다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가 되고 몽골 제국 밖에서 문화를 교류한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게 되지만 반면 몽골영토에 들어선 제국들은 내륙 지향적 정책을 펼쳐 새로운 뭔가를 하지 못해 결국 유럽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기 시작한다. 

 

몽골에 의한 동서교류 

1402년 조선에서 탄생한 위대한 유산 혼일강리역대지도에는 한반도, 중국 및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도 그려져 있다. 당시 아프리카를 방문할 일이 없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인데  몽골 제국을 통한 지리 지식의 전파로 세계에 대한 넓은 시야를 확보한 계기가 된다. 

 

혼일강리역대지도 한반도, 중국 및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도 그려져 있다.

[333회]

 

 

칭기스칸(테무진)이 몽골의 대칸이 되기까지 ~ (몽골 통일 과정)

몽골 영토 크기, 규모 1995년 워싱턴 포스트 선정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뽑인 인물이 바로 칭기스칸이다. 세계 일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칭기스칸은 그 당시 고작 10만 명도 안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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